리스본,
새로운 아트 허브의 꽃을 피우다
리스본에서 트램은 효율적인 이동을 돕는 최적의 수단이다.
유럽 국가 중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 편리한 이동, 무엇보다 지중해 심해에서 퍼져 나오는 청량한 무드가 일상에 스며 있는 도시. 199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말대로 과연 ‘리스본은 그 자체로 충분한 곳’이다. 엔데믹에 이른 작년 9월, 포르투갈에서 원격 근무자가 최대 5년까지 거주할 수 있는 디지털 노매드 비자가 발표되어 이제 리스본은 두 번째 인생을 위한 도시로 새로이 주목받는다. 소설이자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처럼 삶을 뒤흔드는 만남을 기대하며 리스본행 티켓을 과감히 클릭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막연한 버킷 리스트처럼 품었던 리스본에서의 새로운 삶, 그 꿈을 현실로 이룰 때가 온 것이다.
현재 빠르게 변화하는 리스본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이 몰려드는 만큼, 무수한 관점으로 리스본을 기록하고 향유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휴대폰은 잠시 넣어두자. 그저 트램이 이끄는 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구불구불한 언덕 지형의 리스본 면면을 따라 거닐며 우연한 시간 속에 자신을 맡기기를 바란다.
오늘의 디자인을 발굴하다, 디자이너 에마뉘엘
프랑스 디자이너 에마뉘엘 바블드Emmanuel Babled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디자인 스튜디오를 리스본으로 옮긴 후 1년이 되지 않아 삶의 터전도 옮겼고, 아티스트를 지원하기 위한 프라임 매터 갤러리Prime Matter Gallery를 오픈했다. “지금 리스본의 모습은 독일 베를린을 떠올리게 해요. 많은 이가 예술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이는 것 같아요. 젊은 아티스트들은 아름다운 아줄레주azulejo 타일로 뒤덮인 낡은 건축물을 캔버스로 삼고 있죠.” 리네로제, 에르메스, 디올 등 여러 명품 브랜드와 협업한 디자이너 노에 뒤쇼푸르-로랑스Noe′ Duchaufour-Lawrance는 또 다른 이유로 이곳을 택했다. “리스본은 과거부터 항로 개척과 무역의 중심지였어요. 그만큼 다양한 문화가 뒤섞이면서 여느 유럽 도시와 비교할 수 없는 독창적 분위기가 생겼죠. 이런 융합과 통섭의 즐거움을 깊이 느끼기 위해 포르투갈 장인과 함께 오늘의 디자인을 발굴·연구·제작하는 갤러리, 메이드 인 시투Made in Situ를 설립했어요. 리스본 고유의 문화를 본격적으로 불러들였죠.” 어찌 보면 그간 포르투갈 예술은 프랑스, 스페인 예술에 비해 소외된 편이었다. 독자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래서 현재까지 고유의 성질을 온전히 유지하면서 실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디자이너 에마뉘엘 바블드가 설립해 앨리스 갈레피Alice Galeffi가 운영하는 예술·디자인·장인 정신을중요시하는 프라임 매터 갤러리.
스튜디오 테라스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에마뉘엘 바블드의 모습.
펠리파 알메이다의 도자 예술과 삶
앞서 언급한 대로 포르투갈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하늘을 연상시키는 푸른 타일 장식 아줄레주다. 궁전 외벽부터 교회, 지하철역, 주택, 거리 바닥에 이르기까지 색색 타일이 장식되어 있다. “관광객들은 아줄레주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지만 아티스트들은 그 이면의 이야기를 궁금해합니다. 타일이 탄생한 배경을 짚어가다 보면 유럽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굵직하게 뿌리 내린 도자 문화를 발견하게 되죠.” 세라미스트 펠리파 알메이다Felipa Almeida는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평범한 도자기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크기와 색상이 다양한 도자기는 그것을 소유한 이들의 삶의 행태를 반영하고, 그 자체로 독자적 대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는 이러한 신념하에 전시를 기획하고 제품 판매까지 연결한다. 프랑스인 세실 메스텔란Ce′cile Mestelan이 운영하는 세라믹 공방과 갤러리, 아 비다 포르투게자 콘셉트 스토어A Vida Portuguesa Concept Store, 비우바 라메구 세라믹 팩토리Viu′va Lamego Ceramic Factory 등을 추천했다. 아티스트 바스쿠 아구아스Vasco Aguas 또한 먼지 쌓인 과거에서 탐미의 단서를 발견한다. 그는 과거 직물과 염색 방식을 차용하되 현대적 생활 방식에 융화되는 제품을 제작한다. “세계 각지의 예술인이 모여 리스본을 리스본답게 만드는 것 같아요. 포르투갈 고유 방식에 각자 스타일을 혼합해 제3의 물결을 만들고 있죠. 리스본에서는 이방인과 토착인을 구분하지 않고 ‘리스본 사람’이라 부릅니다. 전시, 비즈니스 등을 통해 리스본 예술을 알리는 데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죠.” 그는 자신의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바네마Banema, 문화 예술 공간 LX 팩토리 등 열린 예술 공간을 찾아가보라고 권했다.
폐공장, 예술의 공간으로 변모하다
이전에 폐공장 지역이던 알칸타라는 이제 예술가의 지역으로 거듭나 관광객이 한 번쯤 찾는 장소가 되었다. 한국의 성수동 풍경을 연상시키는 알칸타라의 공장 건물을 살펴보자. 얼핏 황폐해 보이는 외관과 상반된 다양성 그 자체와도 같은 내부. 크고 작은 작업실이 어깨를 맞대고 있으며 각 벽면은 예술 작품으로 빼곡하다. 예술가들은 서로 단합해 비영리 갤러리를 만들기도 하고 해외의 유명 아티스트를 초대하기도 한다. 또 축제도 열린다. 매년 열리는 컨템퍼러리 아트 페어 아르코 리스보아ARCO Lisboa, 리스본 바이 디자인Lisbon by Design, 3년마다 열리는 리스본 건축 트리엔날레(Lisbon Architecture Triennale) 등이 대표적. 매년 가을 열리는 리스본 국제 영화제(Lisbon International Film Festival)도 점차 주목받고 있다. 도저한 문화적 토양에 깃든 다채로운 예술이 탐스러운 꽃처럼 피어나는 중이다.
산타 클라라 1728 호텔 내 14석 규모의 다이닝 공간 ‘케이아Ceia’.
알파마의 오래된 무어 문화 지구의 18세기 건물에 위치한 산타 클라라 1728. 바로크 시대의 분위기에 현대적 미니멀리즘을 첨가했다.
주앙 호드리게스의 시대적 감각
리스본 아트 신에서는 건축에 대한 관심 또한 뜨겁다. 그도 그럴 것이 포르투갈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에서 건축가 알바루 시자A′ lvaro Siza와 에두아르두 소투 드 모라Eduardo Souto de Moura, 2명의 수상자를 배출해낸 국가다. 한국의 파주 출판단지에 위치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Mimesis Art Museum이 바로 알바루 시자의 작품이다. 리스본에는 에두아르두 소투 드 모라가 직접 개조한 럭셔리 부티크 호텔 바이루 알투Bairro Alto가 있다. 1952년 포르투갈 포르투Porto에서 태어난 그는 5년간 알바루 시자를 사사한 후 독립해 1980년부터 현재까지 60여 개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건축의 본질을 응축해 담는 데 조예가 깊은데, 이는 18세기에 지은 건물을 개조한 바이루 알투 호텔만 봐도 명백히 알 수 있다.
“호텔은 건축을 경험하는 직관적 방법입니다. 그래서 알파마 지역에 위치한 18세기 건물을 보자마자 호텔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일런드 리빙 그룹을 운영하는 호텔리어 주앙 호드리게스Joa~o Rodrigues는 1728년에 지은 유서 깊은 타운 하우스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산타 클라라 1728 호텔을 기획했다. 건축가는 마누엘 아이르스 마테우스Manuel Aires Mateus를 선택했다. 알바루 시자처럼 포르투갈 건축의 주요 요소인 자연과의 유대감을 가장 현대적 화법으로 풀어낼 수 있으리라는 신뢰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건축물을 두고 ‘온화한 미니멀리즘’이라 부른다. 마누엘 아이르스 마테우스는 건축가를 ‘관계를 맺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공간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집 밖 도시, 마을, 자연과 이어져야 합니다. 건축물이 자리할 장소의 도시적 상황이 깃들어야 하니까요.”
산타 클라라 1728 호텔 개조를 담당한 건축가 마누엘 아이르스 마테우스.
건축가 마누엘의 철학: 건축의 관계
건축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속에서 윤리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한다는 포르투갈 건축에 뿌리 내린 이 개념은 예술·건축·기술 박물관(Museum of Art, Architecture and Technology, 줄여서 매트 뮤지엄MAAT MUSEUM이라 부른다)에서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다. 2016년 건축 트리엔날레에서 처음 소개된 이 건물은 영국 건축 회사 AL_A의 여성 건축가 어맨다 리베트Amanda Levete의 작품이다. 그는 타구스강을 옆에 끼고 8개 차선과 철도, 화력발전소가 들어선 부지를 인도교로 이어 도시, 사람, 자연을 연결한다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마치 모래성을 쌓은 듯 길게 늘어선 길은 박물관 지붕으로 이어진다. 지붕은 전망대와 광장 역할을 하면서 거대한 물결처럼 오르락내리락 유연하게 움직인다. 건축가는 대항해시대 포르투갈 역사를 생각하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강물의 형상을 담고자 했다. 사람들은 건물 위아래, 주변 곳곳을 산책하며 건물과 도시의 유기적 관계를 모색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건축물의 백미는 마치 새의 깃털처럼 건물 전체를 감싼 외관 표면이다. 철 소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세라믹 타일이다. 뾰족한 타일이 촘촘하게 연결되면서 휘고 뻗어나간다. 강물이 반사된 빛이 착각을 일으키면 표면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호기로운 발상, 하이테크 건축
매트 뮤지엄처럼 유리 및 철, 알루미늄 같은 금속 재료를 사용해 구조와 설비를 노출하는 기계 미학을 드러내는 방식을 하이테크 건축이라 부르는데, 리스본에는 하이테크 건축의 시초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오리엔테 역(Gare do Oriente)이다. 리스본이 건축적 변화를 시도한 것은 1998년 엑스포를 준비하면서다. 스페인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는 혁신적인 구조 기술을 바탕으로 역 전체 외관을 높이 25m에 이르는 60개의 철골 야자수 기둥으로 장식하는 하이테크 건축을 소개했다. 당시 공학적, 기술적 건물이 미학적 공감을 얻기란 쉽지 않았지만 지금 이곳은 건축학도라면 한 번쯤 둘러봐야 할 명소로 꼽힌다. 철골 기둥이 받치고 있는 유리 지붕은 낮과 밤에 따라 역 안에 다른 표정을 삽입하고 계절의 변화까지 예술적 장면으로 풀어낸다. 딩동 스튜디오 앤 스토어Ding Dong Studio & Store 건축가들은 리스본에 사람이 몰리고 공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젊은 건축가들의 상큼한 발상이 필요해졌다고 말한다.
38,000㎡ 규모를 자랑하는 매트 뮤지엄. 계단을 따라 옥상에 오르면 강 전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18세기의 고전적 아름다움이 깃든 팔라시우 시아두 레스토랑.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정겨운 한 끼
리스본이 정의하는 미식은 미슐랭 스타 셰프의 고상한 요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 친근한 이모님이 뚝딱 만들어내는 가정식 요리에 가깝다. 신선한 새우와 쌀, 고수 등을 넣어 끓인 해물밥, 통째 구운 닭을 피리피리 소스에 찍어 먹는 전기 구이 통닭 같은 메뉴다. 갓 잡은 해물과 지역 농장에서 공수한 육류를 베이스로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레시피에 타고난 손맛을 더해 최상의 요리를 탄생시킨다. 포르투갈 음식의 매력은 신선함이 좌우하는 만큼, 갓 잡아 구운 생선과 맥주 한 잔만으로도 여행길에 축적된 피로를 해소할 수 있다.
느지막한 오후, 허기가 진다면 18세기의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곳, 팔라시우 시아두 레스토랑Pala´cio Chiado Restaurant이나 타구스강의 석양을 배경 삼아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자바 루프톱Java Rooftop으로 향해보길 권한다. 칵테일 한잔이 선사하는 기분 좋은 취기처럼 아름다운 풍경, 최상위 품질을 보장하는 메뉴, 합리적인 가격까지 갖춰 만족스럽다. 함께 즐기면 좋은 포트와인은 위스키처럼 숙성 방법에 따라 맛의 깊이와 결이 달라지며, 달콤한 디저트와도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리스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디저트는 포르투갈어로 ‘나타’라 불리는 에그 타르트다. 제로니무스의 수도사와 수녀가 만들어 판매하면서 원조로 알려졌다. 독보적인 맛집 파스테이스 드 벨렘Paste′is de Bele′m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색적인 맛을 찾는다면 카스트루 아틀리에 드 파스테이스 드 나타Castro Atelier de Paste′is de Nata로 향하자. 페이스트리 셰프 다니엘 세이사스Daniel Seixas는 색다른 에그 타르트와 무궁무진한 향미의 디저트를 소개한다.
writer Gye Anna, Monica Spezia
editorKim Minhyung
photographerMonica Spez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