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없는 식재료의 맛
묵
2020/5 • ISSUE 25
editorKim Jihye
writerKim Minkyoung, Go Young 음식 문헌 연구가
photographerSim Yunsuk
stylistKim Jinyoung
"밤도 칡도 묵의 재료가 되었다. 상대적으로 얻기 수월한 모든 앙금이 묵 재료다."
낱알에서 온 묵, 구수함을 잘 살린 메밀묵
잘 쑤어 식힌 묵은 그대로 먹거나, 차가운 육수나 따끈한 장국을 더
해도 씹는 재미를 느낄 만한 탄력을 유지한다. 거기다 씹을수록 구수
함이 올라온다. 한여름에 훌훌 넘기는 차가운 메밀묵밥 속 묵이라든지, 국밥이며 온면 등에 올린 메밀묵에 바라는 내 감각을 떠올리면 마침맞겠다. 관청과 궁에 자기를 남품하던 지규식(池圭植, 1851~?)이
1891년부터 1911년까지 약 20년 7개월간 쓴 일기인 〈하재일기荷齋日記〉 속 기록이 재밌다. 경기도와 서울을 바쁘게 오가며 일한 지규식
은 점심이나 밤참으로 메밀묵을 사 먹곤 했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메밀묵은 언제 어디서나 쉬이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지규식이 살던 시대의 메밀묵 만드는 법은 어떠했을까? 대체로
19세기 말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에 담
긴 ‘메밀묵법’ 항목은 이렇다. “메밀을 쓿어 키로 까불러서 물에 데쳐
담갔다가 일어서 건져서 빻아 체로 걸러 쑨다. 눅고 되기를 맞추어 쑤되 뭉근한 불로 때라.” 오늘날 메밀묵 쑤는 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녹말이나 앙금을 다루는 기본 기술이 달라질 리 없다. 한순간을
지난 뒤의 ‘뭉근한 불’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묵 쑤기의 핵심이다.
녹두 또한 오래 사랑받아온 묵 재료다. 녹두 앙금을 그대로 써서
쑨 말갛게 하얀 묵이 청포묵, 녹두 앙금에 치자 우린 물을 더해 노랑
이 화사하게 올라온 묵이 황포묵이다. 오늘날 잡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탕평채는 청포묵을 전제로 한 음식이다. 조선 후기 서울의 일
상 기록부터 읽어보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
雜志〉 중 한 구절이다. “탕평채蕩平菜는 녹두묵(菉豆乳), 돼지고기,
어린 미나리 등을 실같이 썰어 초장에 묻힌 것이다. 아주 깔끔해서 봄날 밤에 먹기 좋다(蕩平菜者菉豆乳, 猪肉芹苗縷切用醋醬衝之, 極
凉春晩可食).” 19세기 말에 쓰인 조리서 〈규곤요람閨壼要覽〉(연세대본) 속 ‘탕평채(‘녹두묵’을 병기)’ 기록은 〈경도잡지〉의 기록보다 자세하다. 이를 오늘날의 한국어로 풀어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녹말묵을 잘게 치고 육회를 잘게 쳐서 차게 하여 볶는다./ 미나리는 살
짝 데쳐 헹구어 깨끗이 하고 마늘과 파 등 갖은 고명과 썬 미나리를 한
데 무친다./ 위와 같이 준비된 재료에 식초를 쳐 담고 김가루, 잣가루,
고춧가루를 뿌린다. 탕평채 만드는 법은 녹두묵과 함께, 녹두묵 만드는 법은 탕평채와 함께 19세기 말을 지나 식민지 시기도 넘어 전해졌다. 그러면서 탕평채와 잡채가 뒤섞인다. 한편 일찌감치 비빔밥을 상업화한 전주에서는 비빔밥에 황포묵을 올려 색채에 방점을 찍었다.
묵과 묵 음식의 내일을 여는 상상력
녹두묵과 헷갈리기 쉽지만 동부묵은 동부콩 앙금으로 쑨 묵이다. 녹두묵이 말갛게 희다면 동부묵은 우유처럼 희다. 부드럽기는 녹두묵이고, 탱탱하기는 동부묵이다. 자신의 기호에 따라, 적절히 배선配膳하면 그만이다. 17세기 이후 안데스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아시아로, 또
한반도로 들어온 옥수수도 묵의 재료가 되어주었다. 올챙이묵이 대표
적인 예다. 나무 열매에서 온 묵이라면 역시 참나무 열매인 도토리로
쑨 묵이다. 아득히 먼 시절 인류의 조상도 도토리가 녹말을 많이 품은
열매임을 금세 알아챘다.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한국인의 조상들도 한
반도에서 도토리를 식재료로 삼았다. 도토리묵도 아주 일찍 쑤기 시작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껍질만 까 쪄 먹었겠지만, 이윽고 묵 쑤기를
터득했을 테고, 곧 묵이 우세해졌을 테다. 순치된 쓴맛에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메밀묵이 구수하고, 녹두묵이 고소하다면, 쌉싸래한 향미가 주는 개운함은 도토리묵의 개성이자 매력이다. 편안한 나무 냄새는 덤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식생이다. 한반도 곳곳에 서식하는
도토리의 속성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고, 도토리묵의 빛깔·질감·탄력·향미의 어우러짐도 다채롭다. 이를 ‘테루아’의 시각으로 소화해
도토리묵을 보다 섬세하게, 또 고도화할 수 있다면? 이런 점이 묵 좋아하는 분들과 나누고 싶은 글쓴이의 생각이다.
다양한 묵 종류와 특징
식물성 재료의 녹말로 낸 앙금으로 풀을 쑤어 만드는 각양각색 묵.
청묵
메밀묵은 메밀가루로, 청묵은 메밀쌀로 만든다. 메밀쌀을 물에 불려 베주머니 등에 넣고 뽀얀 메밀 전분을 우려내 묵을 쑨다. 묵 가루로 만든 것보다 말랑거리고 부드럽다.
청포묵
껍질 벗긴 녹두(청두)를 불리고, 갈아서 가라앉은 앙금으로 묵을 쑨다. 투명한 듯 뽀얀 색처럼 맛이 깨끗해 여러 양념과 두루 잘 어울린다. 봄과 여름에 많이 쑤어 먹는다.
도토리묵
참나뭇과의 열매인 도토리는 가을이 제철이다. 도토리의 떫은맛을 내는 타닌 성분은 소화를 돕는다. 색이 진하고 탱탱하다.
옥수수묵
강원도에서 흔히 먹는 독특한 여름 묵. 옥수수 가루를 풀처럼 쑤어 구멍이 난 틀에 내려 모양을 만든다. 틀에 내린 모양이 재미나 올챙이묵이라고도 한다.
올방개묵
봄 논에 무성하게 자라 골칫거리 잡초로 불리는 올방개 뿌리의 전분으로 만든다. 묵이 흐린 진주색을 띠는데, 오묘한 윤기와 빛이 나고 여느 묵보다 덜 부서지는 쫀쫀함이 있다.
칡묵
전분이 많은 암칡을 물에 불려 방망이로 두들겨 전분을 빼 만들었는데, 요즘에는 칡가루로 간편하게 묵을 쑬 수 있다. 칡 특유의 쓴맛은 나지 않고 심심하다.
우뭇가사리묵
해조류인 우뭇가사리를 찧거나 불려서 물과 함께 끓여 만든다. 한천의 재료이며 양갱처럼 말랑하게 굳혀 먹는 음식을 만들 때 자연 응고제로 많이 쓴다.
동부묵
다른 콩에 비해 탄수화물 함량이 높아 맛이 달고 소화가 잘되는 동부콩이 원료다. 좋은 콩으로 쑨 묵에서는 콩의 구수함과 밤처럼 달착지근한 풍미가 은은하게 난다.
건조묵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말린 묵말랭이. 메밀묵, 도토리묵으로 주로 만드나 동부, 청포, 올방개 등 다른 종류의 건조묵도 있다. 물에 불린 다음, 끓는 물에 넣고 쫄깃할 때까지 삶는다.
묵 가루
전분이 없는 재료로 묵을 만들 때는 엉기는 힘을 주는 다른 묵 가루를 많이 넣게 된다. 이때 색, 향, 맛을 고려해 잘 어울리는 것을 고른다.
집에서 쉽게 묵 만들기
묵 맛있게 쑤는 법
도토리는 떫고 쓴맛이 강하므로 껍질째 물에 사나흘 정도 담가 충분히 불리는 것이
좋다. 그래야 껍질 벗기기도 좋고, 떫고 아린 맛도 잘 빠진다. 불린 도토리는 물과 함께 곱게 갈아 체에 걸러 가라앉혀 앙금만 쓰는데, 이때 거르고 남은 도토리 찌꺼기에
전분, 송송 썬 김치 등을 넣고 기름을 넉넉히 둘러 전을 부쳐 먹으면 맛있다. 황포묵을 만들 때는 녹두 앙금 1컵에 치자 물 5~6컵 정도의 비율로 넣으면 색이 알맞게 난다. 녹두 앙금을 먼저 끓이다가 엉기기 시작할 때 치자 물을 조금씩 넣고 섞으며 끓여야 색이 골고루 잘 밴다. 전분이 없는 재료로 묵을 만들 때 쓴맛이 나는 재료라면
동부처럼 맛이 좋은 것을, 색이 너무 진하다면 청포처럼 흐린 색을, 향을 살리려면 올방개처럼 향이 덜 나는 것을 바탕 묵 가루로 택한다.
묵을 활용한 별미 요리
도토리와 메밀로 만든 묵은 특유의 쌉싸래한 맛을 살리는 게 좋다. 들기름과 잘 어울리며 향이 강한 채소와 곁들여도 좋은데, 이때는 양념이 자극적이지 않을수록 맛있다. 청포묵과 황포묵처럼 맛이 정갈한 묵은 간간하게 양념한 고기, 시원한 오이나 상추, 단맛이 좋은 당근과 시금치, 녹두의 싹인 숙주와 잘 어울린다. 고추장이나 간장, 어느 양념이나 조화로운데, 묵만 먹으려면 간장, 여러 재료와 어우러지게 하려면 고추장이 알맞고, 고기가 많이 들어가면 겨자 양념도 추천한다. 말린 묵은 떡처럼 생각하고 요리해도 좋으며 떡볶이를 만들 때 떡과 섞어 넣으면 맛있다. 집에서 묵을 만들었다면 꾸덕꾸덕하게 말려 기름에 앞뒤로 구워 먹으면 구운 떡이나 고기가 부럽지 않다. 국수 모양의 곤약, 천사채, 우뭇가사리, 옥수수묵은 쫄면 양념에 채소를 듬뿍 넣고 비비거나, 콩국수 국물에 말아 훌훌 떠먹어도 잘 어울린다.
묵에 잘 어울리는
양념장 · 육수 레시피
간장 양념
간장, 고춧가루, 설탕 등 기본 재료에 식초, 깨소금, 다진 마늘, 다진 파 등을 곁들이고 참기름, 들기름도 입맛에 따라 넣는다.
묵무침 양념장 Tip
1. 묵무침 양념은 고추장보다 고춧가루로 맛을
내고, 식초를 넣어
새콤매콤하게 만든다.
2. 소금, 참기름, 깨소금으로 간할 때는 김, 깻잎,
미나리 등
맛이나 향이 강한 재료를 더한다.
3. 신 김치를 곁들일 때는 양념을 털어내고 작게 썰어기본 맛국물
다시마 국물용 멸치를 기본으로, 북어 대가리, 마른 표고버섯, 가쓰오부시, 무 등을 첨가하기도 한다. 마른 고추로 살짝 매운맛을 더해도 좋다.
묵사발 육수 Tip
1. 따뜻하게 먹을 때는 장국에 간장 양념을 하고
참기름, 통깨를 뿌린다.
2. 냉국물은 기본 맛국물에 식초, 설탕,
국간장으로 새콤달콤한 맛을
더하기도 한다.
3. 조림을 할 때는 취향에 맞는 맛국물에 물, 청주,
미림, 설탕 등과
곤약을 넣어 조린다.
신선하고 간편하게 즐기는
신세계백화점 묵 요리
도토리묵 · 청포묵 · 메밀묵으로 만든 건강 밥상.
묵냉채
부드러운 청포묵을 살짝 데친 다음 채 썬 당근, 오이, 표고버섯, 소고기, 숙주나물과 함께 섞은 뒤 달콤 짭짜름한 양념으로 무쳐 먹으면 별미인 전통 음식.
고메홈 • 1팩(400g 내외), 1만원
본점, 강남, 경기
도토리묵 · 청포묵 화전
직접 쑨 도토리묵과 청포묵을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납작하고 동그랗게 썰어 녹말가루와 달걀흰자를 얇게 입힌 후 예쁜 식용꽃을 얹어서 부친 전 요리.
시화당 • 100g당, 4천원
본점, 강남, 영등포
도토리 김치 묵밥
멸치, 다시마로 우린 육수에 새콤달콤한 맛을 더한 묵밥 국물에 도토리묵, 김치, 오이, 김을 넣고 시원하게 혹은 따뜻하게 즐길 수 있는 묵밥 한 그릇.
시화당 • 1팩, 1만원
본점, 강남, 영등포
양념 도토리묵
적당한 크기로 썬 도토리묵을 그릇에 담고 톡 쏘는 매운맛과 향이 좋은 달래를 쫑쫑 썰어 넣어 진간장, 마늘, 고춧가루, 통깨, 참기름을 넣은 달래장을 그 위에 뿌려서 담아낸다.
자연미예찬 • 100g당, 3천5백원
본점, 강남, 경기, 의정부
메밀묵 김치 무침
새콤달콤한 신 김치, 달걀 지단, 구운 김, 오이를 메밀묵과 함께 썬 후 과일과 간장 등을 넣어 끓여 만든 과일 간장과 고춧가루, 마늘, 파, 들기름을 넉넉히 넣은 메밀묵 김치 무침.
시화당 • 100g당, 4천원
본점, 강남, 영등포
간편하게 바로 맛보는
종류별 묵 식품
메밀묵
여름에 먹기 알맞은 메밀로
쌉싸래한 맛과 부드러운 식감.
산해찬 • 420g, 4천8백원
청포묵
비빔밥과 잘 어울리는
야들야들한 식감과 담백한 맛.
산해찬 • 420g, 4천8백원
순도토리묵
순수 도토리 100%로 만든
도토리 본래의 향과 고소한 맛.
풀무원 • 420g, 3천2백50원
국산도토리묵
국산 도토리로 만들어
쌉쌀하면서 진한 맛이 특징.
풀무원 • 300g×2입 기획상품, 3천5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