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넘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는 베토벤의 바이올린협주곡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평가에 걸맞은 연주를 남겼다. 1958년 지휘자 앙드레 클뤼탕스와 파리에서 협연한 베토벤의 협주곡 앨범은 아직도 최고의 음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덕분에 영국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발매한 LP 초반은 오늘날 문화재급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명곡인 만큼 오이스트라흐 말고도 명연주가 많다. 오이스트라흐 때문에 평생 2인자에 머물러야 했던 레오니드 코간은 특유의 서늘한 드라마를 펼친다. 고속으로 질주하는 하이페츠의 연주도 강렬한 쾌감을 선사한다.
정경화는 베토벤 협주곡을 두 번 녹음했다. 한번 녹음한 곡은 다시 돌아보지 않던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첫 녹음은 1979년 9월 빈의 조피엔잘에서 이루어졌다. 소련에서 망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휘자 키릴 콘드라신이 빈 필하모닉을 지휘해 반주했다. 한국인 연주자가 빈 필과 협연한 최초의 기록이고, 콘드라신이 동양인 독주자와 호흡을 맞춘 것도 처음이었다.
녹음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정경화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아니다. 이걸 내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서른한 살의 한창 나이, 완벽함을 목숨처럼 여기던 그는 고민 끝에 녹음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레코딩 테이프를 살 수 없을까요?” 음반으로 제작되는 걸 막고 싶었다. 그러나 데카 레코드가 빈 필과 키릴 콘드라신을 기용해 진행한 대규모 녹음 세션을 독주자 마음대로 폐기할 수는 없는 노릇. 그날의 연주는 음반으로 출시됐다.
정경화가 그날의 연주에 대해 자책한 점은 베토벤 협주곡의 장대한 구조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 연주라는 것이다.
정경화는 10년 뒤 클라우스 텐슈테트가 지휘하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와 베토벤을 다시 녹음했다. 불혹에 이른 바이올린 여제는 실황인데도 완벽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EMI에서 발매한 음반을 들어보면 연주 뒤 환호하는 청중의 열기가 대단하다. 정경화는 그제야 빈에서의 잠 못 이룬 밤을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79년 연주는 잊혔을까. 그렇지 않다. 정경화 입장에서는 악취미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가 불만스러워한다는 것을 안 음반 애호가들은 옛 음반에 더 귀를 기울인다. ‘도대체 어떤 부분이 문제일까’ 하면서 말이다. 1989년의 완벽하고 원숙한 연주는 그것대로 좋지만, 세상에 매끈한 연주는 많다. 레코드는 특히 그렇다.
소련 출신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는 64세인 1991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녹음했다. 평생의 숙제를 끝낸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모음곡을 녹음한 적이 있다. 20대에 모스크바에서 2번을, 30대에 뉴욕에서 5번을 각각 녹음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평생 그 녹음에 대해 자괴감을 감추지 않았다. “두 음반만 생각하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그렇다고 이미 한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들어봐도 불안하고 서툰 구석이 많다. 그러나 어떤 평론가는 “30대의 젊은 기백이 도처에서 꿈틀거리는 명반”이라고 칭찬한다. 오히려 그의 새 녹음에 대해서는 피에르 푸르니에, 야노스 슈타커를 뛰어넘었다는 평가가 드물다.
나의 친구인 음악 애호가 K는 정경화의 1979년 연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악장 라르게토가 아주 깊더군. 작곡 당시 베토벤이 빠져 있던 사랑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한 연주라고 생각해.” 바이올린협주곡을 작곡할 때 베토벤은 미망인 요제피네 다임 백작 부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우던 귀족 여성으로 집안의 강요에 의해 스물일곱 살 연상의 다임 백작과 결혼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다시 베토벤을 찾아왔다. 그 무렵 그녀에게 쓴 편지에는 사랑의 불길이 일렁인다. “오, 나의 유일한 사랑이여, 왜 당신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걸까요. 오직 음악으로만 가능할 거예요.” 이런 감정이 녹아 있는 것이 정경화의 1979년 연주 라르게토 악장이라는 것이다.
음반은 세상에 나오면 제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 세상에 내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던 녹음이 누구에게는 어떤 음반보다 베토벤의 내면을 잘 드러낸 것으로 여겨진다. 나도 젊은 시절의 로스트로포비치, 정경화의 음반을 간혹 듣는다. 덜 다듬어졌지만 더 높은 곳을 향하는 예술혼이 담겨 있다. 무대 뒤에서 혼자 연습에 몰두하는 배우의 모습이랄까. 그러니 정경화 선생은 이제 그만 1979년 연주를 용서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