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질서를 기념하는 ‘매달기’
조각가 박선기를 만났다. 그의 손에 놓인 숯, 석영, 아크릴 비즈 등의 소재가 공중에 모여 입체적 세계를 펼쳐낸다.
보이지 않는 질서와 감각을 감지하게 하는 그의 작품은 ‘공간적 사유 장치’다.
박선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An Aggregation 20240308’(2024)은 반사와 왜곡, 신체와 감각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조각이라 할 수 있다.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에 설치된 이 작품은 1개당 평균 250g의 크롬 도금한 ABS 플라스틱 볼과 1개당 120g의 투명 아크릴 비즈로 이루어졌으며, 전체 구조는 수직으로 매달린 형상으로 구성되고, 높이는 37.5m에 달한다. 수많은 크롬 볼이 빛을 반사하고, 백화점 내부의 주변 환경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관객의 모습이 조각 표면에 뒤엉켜 투사되며 복합적인 우주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백화점을 찾은 관객의 움직임과 주변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종의 ‘반응하는 오브제’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박선기의 대표 연작인 여타 ‘An Aggregation’ 시리즈처럼 ‘반복된 단위체의 조합’이라는 방법론을 따르되, 재료의 반사성과 투명성이 극대화되면서 조각 자체가 하나의 ‘시각적 스크린’처럼 기능한다. 보는 이의 시선을 포착하는 동시에 왜곡을 유도하며, 더 이상 내부로 침잠하는 덩어리가 아니라 외부와의 끊임없는 관계를 통해 의미를 갱신하는 채널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박선기의 작품은 화이트 큐브형 전시장이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호텔이나 백화점의 공간이든, 관객과 공간, 시간 사이에서 존재한다.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작품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제 작품이 공간과 어떻게 상호 공존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특히 백화점이라는 공간은 관객과 작품의 호흡이 중요한 곳이죠. 그래서 작품이 심오한 사고와 철학을 말하기보다 백화점을 오가는 사람들의 활기찬 발걸음에 조금의 설렘을 더하길 바랐어요.
writer Kim Jaeseok아트 저널리스트
editor Kim Minhyung photographer Yang Joongsan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의 경우, 층고가 아주 높아 아무래도 작품을 설치할 때 빛이 투과되는 구슬의 반짝임부터 안전 문제까지, 세심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았죠. 작품이 바닥에 누워 있을 때와 공중에 매달려 있을 때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작업하는 저 또한 상상만 해보다가 백화점에 설치한 후 그곳을 방문하는 고객들과 동일한 시점에서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래서 조각은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것을 현실에 어떻게 구현하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형태는 불완전해지지만, 재료의 물성이 선명하게 도드라지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부분과 전체의 하모니는 작품에서 중요한 미적 질서가 된다."
자연 속에서 시작된 조각적 감각
박선기 작가는 어떻게 한국 조각의 형식적 한계를 넘어서는 실험을 지속하며, ‘매다는’ 설치 방식으로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해왔을까? 그의 예술적 기원은 경북 ‘선산’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시작된다.
네 가구만 살던 그 마을은 그에게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다. 자연 속에서 성장한
유년 시절 경험은 이후 작가의 조형 철학에 깊은 흔적을 아로새긴다. 숯 같은 재료의 사용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 내재된 자연과의 조화, 질서 감각도 여기에서 출발했을 터. 그는 중앙대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한 후 밀라노 브레라 국립 미술원과 런던 바넷 칼리지에서 유학하며 조각에 기술적·철학적 깊이를 더해간다. 한국에서 출발해 유럽에서 연마한 이중 시선은 그의 작품에 독특한 긴장감을 부여했으며, 동서양 미학의 혼성적 결합을 가능하게 했다. 바로 ‘An Aggregation’ 시리즈의 탄생이다. 박선기의 대표 연작 ‘An Aggregation’은 수천 개의 단위체를 투명한 나일론 실로 매달아 공중에 설치하는 작품으로, 작은 단위가 모여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구조를 띤다. 중력에 저항하듯 공중에 매달린 입체물들은 고정되지 않은 자연의 흐름이나 내면 세계에 몰입한 사유의 상태처럼 느껴진다. 이 ‘매다는’ 방식의 시작은 대학 시절 석조장에서 발견한 돌 조각에서 비롯되었다. “우연히 석조장의 수많은 돌 조각을 보고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다가 매달아본 게 시작이었습니다. 졸업 작품 중 한 작품도 수많은 돌을 매달아 제작했죠. 그 뒤로 가장 효과적인 작품 제작 방법을 생각했고, 그중 하나가 공중에 매달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복과 진화를 거친 ‘An Aggregation’ 연작은 고정되지 않은 입체 조각의 경계를 넘어 유기적이면서도 질서 정연한 조형 구조를 구축해가고 있다. 또 다른 대표작 ‘Aggregation 201301’(2013)은 100× 400×300cm에 이르는 숯 덩어리들이 나일론 실에 매달려 육면체를 이룬다. 시각적으로는 단단하고 무거운 물질이 공중에 정지해 있는 듯한 착시 효과를 주고, 관객은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비현실적 조형 질서와 마주하게 된다. 박선기의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은 멀리서 보았던 형태가 가까이 다가가면 해체되는 경험을 한다. 형태는 불완전해 지지만, 개별 단위 재료의 물성이 매우 선명하게 도드라지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부분과 전체의 하모니는 그의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미적 질서가 된다.
박선기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작품 세계의 비밀을 엿보게 해주었다.
Q. 작품을 보면 은하 중심을 공전하는 별과 같은 우주의 궤도 현상이 떠오릅니다. 자연과 우주, 에너지에 대한 관심
이 조각 형식에도 자연스럽게 투영되는 것일까요?
A. 제 작품의 주요 주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제 작품 중에는 자연의 마지막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숯을 재료로 하여 숲을 표현한 것이 많습니다. 제게 자연은 우주입니다. 우리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초적 자산이기도 하죠. 인간이 자연을 조금 더 사랑하고 동반자적 관계로 생각해주길 바라며 작업합니다.
Q. 관객 입장에서는 멀리서 보았던 작품의 형태가 가까이 다가가면 해체되는 듯 보입니다. 형태는 불완전해지지만,
개별 단위 재료의 물성이 선명하게 도드라지며 존재감을 드러내죠.
‘An Aggregation’은 영문 뜻 그대로 조합체를 나타냅니다. 작은 것들이 모여 큰 형태를 이루는 총체적 과정을 뜻하죠. 제 작품의 경우 관객들이 작품 속을 거니는 참여형 작품입니다. 멀리서 형태를 보고 작품 속으로 들어와 질서나 규칙, 재료의 질감까지 느낄 수 있어요. 흥미로운 점은, 작품은 관람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데,
보통 관객은 자신이 익숙한 작품의 모습,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모습으로 보이는 위치에서 작품을 본다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사람은 어떤 대상을 볼 때 관념을 갖고 바라봅니다. 제가 작품을 통해 말하려는 바는
바로 이 지점에 있어요.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작품의 모습이 달라지니 왜곡도 일어나기 쉬울뿐더러 어떠한 시점이든 정해진 답은 없다는 거죠.
Q. 평소 사용하시는 재료에도 눈길이 갑니다. 재료를 선택하실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은 무엇인가요?
돌, 숯, 투명 아크릴 비즈,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사용한 석영까지 모두 작업 과정에서 직접 다뤄보면서 ‘꽂힌’ 순간이 있었죠. 최근 작업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석영은 재료를 깨보니 부서진 단면이 예쁘더라고요.
아크릴 비즈는 2000년대 초반, 밝은 재료를 찾던 중 평화시장 액세서리 가게에서 처음 발견했어요. 원통에 밀리미터 단위로 크기가 분류된 아크릴 비즈가 한데 모여 반짝이는 모습이 아름답더라 고요. 아쉬운 재료는 돌입니다. 대학 시절 돌을 활용한 작품을 만들었고, 계속 이어가고 싶었지만 제 작품에서 사용하기엔 다소 위험한 소재예요. 천장에 돌을 잔뜩 매달고 자칫떨어지면 어쩌나, 인명 피해라도 나면 어쩌나 하고 염려하느라
잠도 못 잘 것 같더라고요.(웃음) 미학적인 요소도 중요하지만 설치미술이기에 안전성 또한 간과할 수 없어요.
Q. 나일론 실로 재료를 하나하나 연결하며 형체를 쌓아 올리는 고된 작업은 수행과 다르지 않게 느껴집니다. 작품을 보면 이성과 감성이 공존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일상과 작품 세계에서 이 두 가지 요소의 비율 또는 균형을 어떻게 맞추시는지 궁금합니다.
제 작품은 지루한 시간과 끊임없는 반복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제 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매일 규칙적인 시간에 작업하되, 끈질기고 집중적으로 임합니다. 작업 과정을 떠올리면 이성과 감성이 공존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1990년대 초반부터 천장에 매다는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작품을 안전하게 설치하려면
그 과정에서 장력을 잘 계산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주로 8배 또는 9배 여유분을 잡고 장력을 계산하는 편이죠. 장력 계산 자체는 수치를 따지는 ‘셈’인 반면, 작품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과정에는 감성과 감각이 수반되죠. 그리고 작품 설치 이후 안전을 고민하는 과정은 신경을 건드리는 일과도 같아서 섬세해야 합니다. 작업을 할수록 공간 장악력과 공간 인지능력이 좋아야겠구나 싶은데, 이 또한 이성과 감성의 균형이 잘 맞아야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즉 작품을 상상하는 시작점부터 설치 과정을 마무리 짓는 지점까지 두 요소의 균형을 조율하는 작업이 내내 이루어지는 거죠.
Q. 작가님에게 조각이란 존재를 탐구하는 방식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작품이 지니는 우월한 값어치가 있다면 단연 작품에서 우러나오는 깊이감”이라고 말씀 하셨죠.
미술 작품은 작가의 사고와 가슴을 통해 표출되는 것이기에 기성품과 차별됩니다.
제 작품의 본질은 깊이감입니다. 작품의 가치는 작가의 노력을 투영하고 많은 시간과 작가 내면의 사고를 반영하며 점차 발전합니다. 그 과정에서 깊이감이 자연스레 더해질 때 타인이 흉내 낼 수 없는,
유일 무이한 색을 작품에 입혀줍니다.
ARTIST PROFILE
박선기 BAHK SEONGHI, 1966~
중앙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밀라노 브레라 국립 미술원에서
유학했다. 마드리드 갤러리 에두르네Edurne(2004),
김종영미술관(2008) 등에서 33회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서울, 부산, 취리히, 로스앤젤레스, 상하이, 홍콩, 두바이, 바젤 등에서
열리는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작품은 루이비통 재단, 신세계백화점, 메르세데스-벤츠 등
주요 공공기관과 기업이 소장하고 있으며,
2006년 제9회 김종영조각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