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붉은 춤을 만나다
2020/9 • ISSUE 28
스페인에는 세 가지 ‘붉은 춤’이 있다. 그림, 투우, 플라멩코.
세 가지 예술 기계가 적색의 미를 생산한다. 화가, 투우사, 무희.
writer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빨강에는 생명의 역동과 죽음의 잔혹이 함께 존재한다.
더 이상 불화를 견딜 수 없다는 듯, 죽음은 한 입씩
생명을 먹어치우지만, 생명은 도무지 포기할 줄 모르고
죽음의 대지에 자신을 기록한다."
“집 색깔 좀 봐."
여행은 낯선 풍경 속으로 육체를 옮긴다. 도시마다 표정이 사뭇 다르다. 스페인은 태양의 나라. <패배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헤밍웨이는 이 나라의 그늘을 두고 “흐르는 물결처럼 서늘”하다고 했다. 집에서 소설로 읽을 때는 와닿지 않더니 바깥을 나서자마자 실감한다. 대낮의 스페인 거리는 빛살이 아니라 불화살이 떨어지는 것 같다. 햇빛 속을 잠깐만 걸어도 살갗이 따끔따끔 아파한다.
짙은 그늘, 뜨거운 햇빛, 청명한 날씨가 어우러진 덕분일까. 거리 색깔이 아주 강렬하다. 하얀 집, 노란 벽, 붉은 담, 군청색 타일이 시선을 파고들어 기억에 둥지를 튼다. 눈 감으면 망막 뒤쪽에 아직 선연하다. 그중에서도 마음이 결코 쫓아내지 못할 색도 있다. 빨강이다. 스페인에는 세 가지 ‘붉은 춤’이 있다. 그림, 투우, 플라멩코. 세 가지 예술 기계가 적색의 미를 생산한다. 화가, 투우사, 무희.
고야의 붉은 춤은 피와 살의 춤이다
첫 번째 ‘붉은 춤’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있다. 고야의 작품들이다. ‘옷을 벗은 마하’나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같은 작품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내 마음을 끈 것은 따로 있다. ‘변덕’이나 ‘전쟁의 참화’ 같은 판화, ‘산 이시도르 순례 여행’ 등 말년의 ‘검은 그림’ 연작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모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든다. 고야가 보여준 것은 우리의 무의식이다. 고야는 인간 안에 갇힌 지옥을 열어젖힌다. 고야 덕분에 우리는 지옥이 저 멀리, 저 아래 있지 않음을 비로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지옥은 우리 안에 ‘이미’ 존재했다. 인간 구원의 여정을 그려낸 단테와 달리, 고야의 여행은 반대 방향으로 진행된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이성에서 환상으로, 희망에서 절망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마흔 살 무렵, 고야는 중병에 걸려 죽을 뻔한 후 청각을 상실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잦아들자, 마음의 세계가 눈을 떴다. 세계를 이상화하는 교회의 미학은 허위로 드러났다. 구원은 탐욕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 계몽의 약속과 애국의 열정은 곧장 전쟁과 학살로 이어졌다. 인간의 이성이 바로 인간의 악몽이다. 인간의 얼굴 뒤에는 잔혹함과 어리석음이 넘실댄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진실은 아니다. 인간의 진짜 얼굴은 피부 밑에 있다. “세상은 가장무도회다. 모두가 서로를 속인다. 아무도 서로를 모른다.” 그렇게 인간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다. 애써 외면할 뿐 우리는 그 사실을 안다. ‘변덕’과 ‘전쟁의 참화’에 담긴 잔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어쩐지 친숙한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1819년 일흔세 살의 고야는 중병에 걸린 후 또 다시 간신히 살아난다. “살아서 죽음을 겪는 자”는 반드시 지혜를 얻는 법. 고야의 눈은 이전과 다른 것을 본다. 1820년에서 1823년 사이, 마드리드 근교에 있는 전원주택 ‘귀머거리의 집’에 은둔하면서 고야는 벽에 “검은 그림들”을 그린다. 누구한테 보이거나 팔려고 그린 게 아니다. 자기가 살던 집의 벽화로, 오직 자신을 위해서 그렸다. ‘사투르누스’는 그중 하나다.
사투르누스는 막 자신의 아이를 삼키는 중이다. 여기에 망상이 있다. 이 신은 영원히 시간의 지배자로 남기 위해 젊은이가 자라서 힘을 얻는 것을 무서워한다. 여기에 열망이 있다. 이 신은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젊음을 자기 안으로 가져오려 한다. 여기에 광기가 있다. 사투르누스가 먹어치우는 것은 자기 아이다. 여기에 저항이 있다. 이 작은 존재를 붙잡는 게 어렵다는 듯 아이 몸을 쥔 사투르누스의 근육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여기에 에로스가 있다. 신화의 이야기는 아들을 먹는데 그림의 사투르누스는 여성의 몸을 삼키는 중이다. 현재처럼 캔버스에 옮겨지기 전에는 남근이 발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슬픔이 있다. 다가올 운명을 예감하듯 어둠 속에서 드러난 사투르누스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고 표정은 한없이 우울하다.
모든 것이 합쳐져 붉은 춤을 춘다. 피와 살의 춤이고, 생명과 죽음의 춤이다. 아이의 몸은 사투르누스의 입속, 즉 동굴로 들어가는 중이다. 동굴은 무덤이자 자궁이다. 죽음의 공간이자 삶의 입구다. 인류 최초의 무덤은 동굴 안에 있었다. 그런데 인류는 그 벽에 손을 갖다 대고 입으로 붉은 안료를 뿜어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여기에 내가 있다. 이것이 내 흔적이다.” 죽음의 아가리 속에서도 인간은 기어이 죽지 않는 법을 발명한다. 예술이다. 그리하여 동굴은 이 세상에 돌아오는 부활의 입구가 된다. 인간은 온몸에 어머니 피를 묻힌 채 좁은 동굴을 지나 세상으로 나온다. 신화에 따르면 사투르누스의 동굴은 삼킨 육체를 다시 토해낸다. 망상은 씻기고 열망은 진정되며, 광기는 소멸하고 질서는 회복된다. 벽에 죽음을 토한 고야는 평온한 말년을 맞는다.
투우는 인간과 소가 벌이는 피의 서사시
누에보 다리가 있는 스페인의 소도시 론다에는 헤밍웨이가 머물던 호텔이 있고, 헤밍웨이가 거닐던 산책로가 있으며, 현대 투우의 기원이라 자부하는 투우장이 있다. 이 투우장의 전설이 프란시스코 로메로다. 붉은 천을 흔들면서 소와 싸우는 기술을 창안한 사람이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나오는 투우사와 이름이 같다. 투우장 내부를 거닐면서 투우에 대한 헤밍웨이의 글을 머릿속에 떠올려본다.
투우에 쓰는 소는 사납고 거칠다. 온순함을 모르는 원시 들소에 가깝다. 투우사 앞에 서기 전 24시간 동안, 소는 어둠에 갇혀 검은 세상을 겪는다. 일찍이 프랑스의 샹송 가수 조니 알리데가 격렬한 리듬과 격정적 음성으로 토해내던 그 절망적 색깔의 세계 말이다. “검정, 그것은 검정일 뿐! 더 이상 희망은 없어.” 절규하듯 세 번이나 애타게 반복되다가 체념 속으로 침몰하는 노래처럼…. 온 살갗이 일어서는 공포, 피부와 심장이 달라붙는 긴장, 밝음에 대한 갈망으로 하루를 보낸 소의 눈에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해방이다. 무서운 동굴을 탐험하다 기어이 빠져나온 기쁨으로 소는 돌진한다. 장엄한 트럼펫 소리와 함께 환호가 쏟아진다. 거친 질주 끝에 숨을 헐떡이며 소가 우뚝 선 곳은 투우장이다. 인간의 시간으로 일요일 5시, ‘붉은 춤’이 시작될 때다.
투우는 인간과 소가 벌이는 피의 서사시다. 특유의 잔혹함 때문에 많은 곳에서 투우를 금지했다. 소는 색깔을 전혀 알지 못한다. 색맹이다. 소의 세계는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원에서 진화한 소에게는 색깔이 아니라 사나운 적들의 움직임을 구별하는 게 더 중요했다. 소의 눈은 전방의 움직임에 민감하다. 눈앞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붉은 깃발의 춤에 소의 피는 흥분한다.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24시간을 보낸 탓에 소의 신경줄은 이미 허약하다. 이 허술하고 사소한 속임수가 소를 미치게 하는 이유다.
투우사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죽음의 무지막지한 돌진에 정면으로 맞선다. 등을 돌려 달아나거나 펜스를 넘어 피하는 대신, 붉은 천 한 조각을 이용해 우아한 춤을 춘다. 마치 죽음을 다루는 법을 안다는 듯, 삶의 흔적을 붉게 허공에 흩뿌린다. 때때로 죽음의 뿔들이 심장을 치받기도 한다. 이렇듯 죽음을 삶의 절정과 바꾼 사람은 행복하다. 도망치지 않고 죽음과 맞설 줄 알았으니까 말이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면 거기엔 해피엔딩이 있을 수 없다. 죽음이란 반드시 찾아들어 남겨진 자는 사랑을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인생에 찾아드는 필연적 공허를 이기는 법을 알고 싶었다. 투우의 춤도, 글쓰기도 이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플라멩코는 인간의 가장 격렬한 정열을 표출한다
플라멩코는 인간의 가장 격렬한 정열을 표출하는 춤이다. 아마도 사랑을 좇는 마음만이 이러한 극단적 즉흥성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심장의 리듬이 피를 두드리고, 피의 격렬한 파도가 몸짓을 지배한다. 아니라면 하나의 동작마다 저토록 다양한 몸짓이 응축될 수 없었으리라. 온 근육이 피에 홀려 각 방향을 택해 움직인다.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감정을 표현하고, 어깨와 허리가 어긋나고 무릎과 엉덩이가 갈라서서 마음을 전달한다.
황홀경이 찾아온 듯, 무희는 눈을 감은 채 무대를 휘돌면서 애절한 사랑을 호소한다. 그러나 호응하는 것은 어둠뿐이다. 어쩌면 무희는 그 속에 짙은 환영 하나를 감추었는지도 모른다. 죽음의 세계에서 불러들인. 모두 각자의 마음에서 깨진 사랑을, 잊힌 존재를 꺼내 허공에 걸쳐둔다. 무희의 애처로운 율동에 마음을 얹은 채 각자의 몽환 속에서 꿈을 꾼다.
플라멩코는 붉은 춤이다. 무희의 옷 색깔이 이 춤의 본질을 드러낸다. 열정(passion)의 기원은 수난이다. 예수는 붉은 피 속에서 죽음으로써 인류에게 영원한 삶을 약속했다. 수난과 기쁨이 하나라는 것을 증명했다. 죽음의 무서운 대지 너머로 따뜻한 사랑을 실어 날랐다. 플라멩코의 정열은 사랑의 수난과 겹쳐 있다. 죽음을 거절한다는 듯, 그 절대적 이별을 파기하겠다는 듯, 어둠의 벽 위에 거침없이 붉은 선들을 그어나간다. 이로써 플라멩코는 가장 에로틱한 춤이 된다.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스를 “죽음을 파고드는 삶”이라고 했다. 플라멩코만큼 이 말에 잘 어울리는 예술은 없다.
인간은 색깔의 동물이다. 인간만이 색깔을 창조하고, 자기 몸과 주변 사물에 색깔을 덧입힌다. 빨강은 검정과 하양의 가운데 색이다. 빨강에는 생명의 역동과 죽음의 잔혹이 함께 존재한다. 더 이상 불화를 견딜 수 없다는 듯, 죽음은 한 입씩 생명을 먹어치우지만, 생명은 도무지 포기할 줄 모르고 죽음의 대지에 자신을 기록한다. 스페인의 빨강에는 상실을 정제해 애정을 산출하고 필멸을 재료 삼아 불멸을 이룩하려는 탐구가 들어 있다. “나를 잊지 마라.” 헛될지라도 이는 삶의 영원한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