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열차에서
‘나를 읽는 나’를 만나다
2020/10 • ISSUE 29
기차는 미지의 생활에 대한 유혹이고,
즐거운 생명감의 절절한 고동침이며,
새로운 체험의 계약이다
writer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기차는 미지의 생활에 대한 유혹이고, 즐거운 생명감의 절절한 고동침이며, 새로운 체험의 계약이다. 소라 고둥에 귀를 대면 신비로운 자연의 소리가 들려오듯, 기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방망이질 치면서 앞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기차가 우리를 곁으로 부를 때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 영혼은 ‘떨림’의 존재다. 순간순간 세계의 접촉에 소스라치고, 매일매일 우주의 울림에 메아리친다. 영혼은 기꺼이, 망설임 없이, 단숨에, 자신을 다시 쓴다. 영혼은 자연의 신호에 맞추어 자신을 재구축한다. 그래서 영혼의 언어는 늘 새롭다.
불행은 우리 일상이 대부분 영혼의 정향에 맞서 물구나무서 있는 데서 비롯된다. 잠들 때마다 우리는 내일이 오늘처럼 아무 일 없기를 얼마나 꿈꾸는가. 두렵거나 놀랄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얼마나 기도하는가. 단단하고 고요한 하루를 보내기를, 같은 시간에 늘 같은 일이 반복되기를 얼마나 바라는가.
생활의 형식은 부동이다. 변화보다 반복을 사랑한다. 인간은 영혼의 떨림을 따라 살지 않고 습관의 명령을 좇아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삶이 우리 영혼의 주파수를 수신하지 못하는 고장 난 라디오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안온한 우울’로, ‘평화로운 공허’로 우리 정서를 몰아간다. 이를 떠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지만, 일단 떠올리고 나면 아무도 견디지 못한다. 보라. 여기, 질문이 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럴 때 기차가 우리를 곁으로 부른다.
“가장 믿을 만하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람”이었던 소설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도 홀연히 사표를 던지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나 역시 프라하로 향하는 야간열차를 탄 적이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도서전을 마친 후 휴가를 하루 더 내서, 프란츠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의 도시를 보고 싶어서였다. 프라하까지는 고속 열차로 7시간 정도 걸린다. 늦은 밤에 기차에 올라타면 새벽 첫 빛을 프라하 역에서 맞을 수 있다. 익숙한 세계를 출발해 하룻밤을 보내면 마법같이 낯선 세계에 도착하는 것이다.
도시들은 아침마다 똑같이 돌아오는 단 하루를 가지고 있을 뿐
현대인은 기차의 속도에 익숙하다. 그러나 1백50년 전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느낀 것은 아니다. 기차의 빠른 속도는 ‘경이’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기차에 앉아서 내다보는 유리창 밖 풍경은 살아 움직이는 듯 느껴졌다. 산과 들은 달리는 것 같고, 마을과 집은 나는것 같았다. <여자의 일생>에서 잔은 기차를 타고 파리로 갈 때 창밖 풍경의 변화에 기함한다. 자기 삶의 익숙한 평온함과 단조로움이 파괴될 것을 이로부터 예감하면서, 자신이 “새로운 삶에” 휩쓸려 드는 것을, “전혀 다른 신세계로 끌려가는 느낌”을 받는다.
시간은 시곗바늘의 차이가 아니다. 눈앞에서 펼쳐지고 소리로 감지되며 피부가 느끼는 공간의 변화량이다. 공간은 시간의 살과 뼈다. 인간에게 시간은 공간의 부피만큼 존재한다. 심장이 열두 번 뛰는 동안, 나무 몇 그루가 눈앞을 지나갔느냐가 인간이 시간을 지각 하는 방법이다. 동시에 속도는 공간을 시간에 맞추어 조직한다. 1시간 동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그 안에서 펼쳐지는 사건을 바꾼다. 사건의 누적된 변화가 곧 우리의 역사다. 속도의 변화는 역사의 흐름을 송두리째 변화시킨다. 개인이든, 인류 전체든 말이다. 기차를 처음 탄 잔은 불안 속에서 이를 느꼈던 것이다.
근대 추리소설은 열차를 이용해 사건의 공간을 확대한다. 현대 범죄소설은 비행기를 타고, 전쟁소설은 초음속 전투기를 타며, SF영화는 우주선을 이용해 무대를 넓힌다. <인터스텔라>는 주인공 일행이 파도와 싸우며 보낸 밀러 행성의 3시간이 지구의 23년 4개월 8일에 해당함을 보여주었다. 속도는 인생을 바꾼다. 누군가한테는 목숨을 건 사투가 펼쳐진 드라마틱한 3시간이, 누군가한테는 기다림이 이어지는 지루한 23년이 된다. 그러나 속도가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 안에 내장된 시계는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 안에는 ‘먹이 구하기 시계’가 있다. 인간의 몸은 먹이를 구하려고 삶터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일에 적합하게 진화했다. <출퇴근의 역사>에 따르면 인간은 “먹을 것을 얻으려면 반드시 여행을 하도록 생물학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거리가 너무 멀면 돌아오기 어렵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면 아이들이 굶주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사냥꾼 유전자’는 자연스럽게 ‘먹이 구하기 시계’와 연동된다. 우리 몸 속 어딘가에 있는 이 모래시계는 왕복 1시간짜리다. 이 시간보다 길어지면 마음은 불안해지고, 불편해지고, 불행해진다. 현대인도 다르지 않다. 자동차, 지하철, 고속 열차를 이용해 이동 거리는 늘릴 수 있지만, 타고난 ‘먹이 구하기 시계’를 바꾸진 못한다. 놀랍게도 전세계 통근자의 이동 시간은 1일 1시간 내외가 대부분이다. 인간은 이렇게 살도록 정해져 있는 셈이다. 행복하려면 출퇴근 시간을 1시간 이내로 조정하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
속도는 인간 경험을 풍부하게 하지만, 인간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하루하루 바쁘게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행불행을 바꾸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룻밤 사이에 도시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 사람들은 늘 내일에 기대를 걸지만, 실제로 찾아오는 것은 또 하나의 오늘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다. <구토>에서 사르트르는 “도시들은 아침마다 똑같이 돌아오는 단 하루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면서, 현대인을 단 한마디로 일갈해버렸다. “바보들 같으니.” 우리 내면의 질서를 다시 쓰지 않는 한,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다.
기차는 인연의 플랫폼이다
인생 첫 야간열차에는 낭만이 있었다.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12시간, 저녁 6시에 출발해 아침 6시에 도착하는 비둘기호 열차를 무작정 탔을 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무전여행, 책에서 보았고, 선배들 무용담으로 듣던 일에 도전했다. 주머니에는 왕복 기차표와 하루 밥 먹을 돈밖에 없었다. 부산 가면 대학 동기와 선배가 있으니 어찌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용감하고 무모했으나 전혀 무섭지 않았다. 하루 쯤 굶는다고 죽지는 않겠지, 안 되면 해운대 바다나 실컷 보고 오지, 하는 생각이었다.
완행열차에는 우발적 만남이 가득했다. 지금은 이름만 남은 간이역을 무수히 지나는데, 무거운 짐을 양손에 가득 든 어르신들이 수시로 타고 내렸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에 나오듯, 옆자리 어른들 정담을 엿듣기도 하고, 때때로 끼어들기도 하며, 삶은 달걀이나 소주 한잔을 얻어 먹기도 했다.
기차는 인간을 평등하게 한다. 표만 살 수 있다면 남녀노소를 가려 태우지 않는다. 자리 배치도 대부분 무작위다. 앞뒤나 옆에 누가 앉을지 알 수 없다. 익명성은 인간을 무섭게도 하고, 자유롭게도 한다. 상대에게 나를 정확히 알릴 필요 없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미련없이 헤어질 수 있기에, 찻간에서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기차는 인연의 플랫폼이다. 그토록 많은 영화나 소설이 기차를 무대로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차 안에서는 우정, 연애, 살인, 폭력, 거래 등이 모두 가능하다. 이효석의 말처럼 기차는 미지의 생활에 대한 유혹이고, 즐거운 생명감의 절절한 고동침이며, 새로운 체험의 계약이다. 소라 고둥에 귀를 대면 신비로운 자연의 소리가 들려오듯, 기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방망이질 치면서 앞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속도는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경험을 풍부하게 하지만, 우리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하루하루 바쁘게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행불행을 바꾸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
자기 삶의 독자가 될 수 있을 때, 나는 ‘나답게’ 된다
오늘날의 고속 야간열차에는 기대만큼 낭만은 없다. 창밖 풍경이 모두 사라진 열차는 규칙적 소리의 리듬으로 다가온다. 반복은 아늑한 죽음이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아늑함이 아득함으로 바뀌면서 눈앞이 깜빡 깜깜해진다. 화들짝 정신을 차려 둘러보면, 창 바깥에서 검은 장막에 얹힌 눈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이 야간열차의 가장 깊은 체험이다.
메르시어는 말한다. “사람은 자신한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되찾기 위해 여행한다.”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은 죽는 것과 노예가 되는 것, 두 가지뿐이다. 여행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어떤 여행도 ‘더 이상 이대로 살 수 없어서’라는 형식을 띤다. 누구나 푸석한 삶에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떠난다. 여행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행동이다. 어떤 여행이든 ‘더 이상 노예로 지낼 수 없어서’라는 목적을 품는다. 모든 여행은 자기 발견 또는 자기 발명을 위한 모험이다.
집을 떠나 낯선 풍물을 즐기고 돌아오는 것은 관광이다.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것은 방랑이다. 여행은 자신을 보려고 떠나는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사람도, 아예 다른 마을로 이주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야간열차는 한밤의 공중에서 물끄러미 ‘나를 읽는 나’를 만나려는 이들 앞에 멈추어 선다.
자아는 회상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하나의 삶을 끝내고 또 다른 삶이 시작될 때 자아가 생겨난다. 현재와 미래 사이를 매듭지어 절대적 차이를 생성할 때 비로소 자아는 나타난다. 지나온 일을 회상하면서 ‘뿌듯해하고 후회하는 나’가 자아의 실체다. 독일어로 회상을 ‘Erinnerung’이라고 한다. er–는 ‘~하게 하다’, –ung은 ‘진행’, inner는 ‘내면’이라는 뜻이다. 회상이란 ‘내 안에서 삶을 다시 살리는 일’이다. 인생을 내면의 책으로 다시 쓰는 것이다. 자기 삶의 독자가 될 수 있을 때, 나는 ‘나답게’ 된다.
여행은 ‘나와 나 자신 사이’의 다양성이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떠나”려는 것은 자아를 새로 마련하기 위해서다. ‘나를 읽는 나’를 마주친 사람만이 자아를 바꿀수 있다. 이전과 다르게 세상을 볼 수 있고, 이전과 다르게 풍경을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여행은 여행지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끝난다. 한밤중 기차 창문 밖에서 물끄러미 나를 읽는 나를 발견했다면, 여행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여행이란 어디까지나 자신을 다시 발명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에세>에서 몽테뉴는 말한다. “인간은 모두 여러 색깔 천으로 이루어진 누더기다. 헐겁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펄럭인다. 그러므로 나와 나 자신 사이에도 나와 다른 사람 사이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이것이 여행이다. ‘나와 나 자신 사이’에 ‘다양성이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나머지를 모른 채, 평생을 하나의 나로서만 사는 사람은 불행하다. 우리 안 어딘가에 불행에 저항하는 힘이 있기에, 우리 심장은 기차를 볼 때마다 두근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