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에서 신을 보고,
골목에서 삶을 만나다
2020/12 • ISSUE 31
추억이 쌓이지 않는 공간, 사랑할 구석이 없는 공간은 인간을 이방인으로 만든다.
writer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동양에는 낙수가 있고, 서양에는 분수가 있다
유럽 도시는 대부분 중심 구조가 비슷하다. 어느 도시나 중앙에 광장이 있다. 광장 한복판엔 분수가 있다. 물에서 길(道)을 읽는 이들은 시냇물을 끌어다 떨어지는 물, 즉 낙수落水를 만든다. 자연이 순리대로 흐르는 것을 보면서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룬다. 이것이 동양의 연못이다. 물에서 신을 보는 자들은 수로를 파서 솟구치는 물, 즉 분수噴水를 만든다. 대지의 억압을 뚫고 솟아나는 생명을 만끽하면서 신의 현현을 찬미한다. 이것이 서양이다. 물의 문명이 동양과 서양을 가른다.
인간의 진짜 정체는 흙이다. 인간은 붉은 진흙(adam)에서 생겨났다. 중국, 이집트, 그리스, 히브리 등 동서양의 많은 신화가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 따라서 가만히 내버려두면 우리 몸은 저절로 땅을 향한다. ‘살이 흙이 되다’란 말은 모든 인간의 삶을 요약한다. 문화란 무엇인가. 이 한 줄을 고쳐 쓰려는 마음의 집약이요 저항의 흔적이다. 방향은 동양과 서양이 다르다.
동양의 문화는 수평적 초월을 지향한다. 극락은 서쪽 하늘 아래 있고, 무릉은 강 상류에 있다. 달마는 서쪽으로 가고, 어부는 강을 거슬러 오른다. 극락이나 무릉이 이미 마음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고도 자신을 넘을 수 있다면 가장 좋다. 동양의 연못은 끝없이 흐르면서도 표면이 거울처럼 매끈하다.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있도록 정중동靜中動, 움직이는 고요를 보여준다. 이에 비해 서양의 문화는 아나바시스anabasis를 지향한다. 아나-ana-는 ‘위로’, 바시스basis는 ‘가다’라는 뜻이다. 아나바시스는 ‘상승’, ‘승천’, 즉 수직적 초월이다.
아나바시스는 ‘내륙으로 들어가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오디세이아>에서 호메로스는 바다를 ‘추수할 수 없는 바다’로 수식해 말한다. 그리스인에게 바다는 죽음의 공간이었다. 번개와 파도가 언제든 배를 두 쪽 내는 곳, 보물을 얻으러 떠났다 자칫 추수도 못하고 스러지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바다로 나가 모험을 즐기고 돌아온 이들은 죽음을 극복한 자, 즉 영웅이 되었다. 반대로 내륙으로 가는 것은 죽음에서 멀어져 안락한 대지를 찾는 일, 역시 초월이었다.
물이 솟구치는 곳에는 권력이 있다
서양 도시의 배꼽에 놓인 분수는 수직적 초월의 물리적 구현이다. 신이 축복의 탯줄을 내린 곳, 곧 생명의 원천이 드러난 신성한 공간이다. 사람들은 분출하는 생명의 힘을 보면서 신을 생각한다. 분수는 유목 문명의 산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한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거대한 강물 사이의 풍요로운 퇴적토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이 태어났다. 건조 지역에서 내려온 유목 민족은 이곳에서 넘치는 물을 이용해 도시를 건설하고 농경을 이룩하고 가축을 길러냈다. 농사는 물의 문명이고, 물을 다스리는 힘을 가진 자만이 온전히 권력을 쥘 수 있었다.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 수로를 파 집 앞까지 강물이 흐르게 하고, 토지를 축축하게 할 힘이 있는 사람이 왕이다. 분수는 그 절정이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을 아래에서 위로 솟게 하는 것은 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기적이다. 성당 앞에 작은 분수인 성수대가 놓인 이유다. 유목 문명의 한 갈래인 기독교에서는 이 물로 손과 얼굴을 적셔 더러움을 씻고 피부에 생기를 돌려주어 신의 현현을 몸으로 확인한 후 신의 땅인 교회로 들어가게 했다. 축복은 이미 내렸고, 예배는 이를 되새김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따라서 물이 분출하는 곳에는 신의 대리인, 즉 권력이 있다. 분수를 둘러싸고 이들이 머무는 곳인 교회와 시청과 궁전 등이 들어선다. 이런 면에서 주황색 지붕이 아름다운 도시, 이탈리아의 볼로냐는 독특하다. 거대한 넵튠 분수가 마조레 광장에 있지 않고 볼로냐 중심가인 리플리 거리로 이어지는 골목 입구에 있기 때문이다.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이 서로 경쟁하던 16세기 중반, 교황 피우스 4세의 귀환을 기념하려고 세운 것이 바로 이 분수다. 새로운 권력인 교황은 거대한 성수대인 분수를 건축해 시민들이 도시의 중심을 드나드는 길에서 자신을 기억하도록 했다. 이곳에서 신의 축복을 누려라, 도시의 지배자인 내 얼굴을 기억하라!
넵튠 분수를 지나면 마조레 광장이 나오고, 산페트로니오 성당, 포데스타 궁전(집정관 저택), 코무날레 궁전(시 청사), 반치 궁전(은행)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이곳이 반항의 도시 볼로냐의 중심이다. 오랫동안 자치를 누려온 볼로냐 시민의 힘으로 지은 곳이다. 교회의 성스러움, 권력의 엄정함, 행정의 공평함, 은행의 활발함이 서로를 비추면서 균형을 이룬다. 은행과 성당 사이 골목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볼로냐대학의 옛 건물이 있다. 이곳에서 지혜가 광장을 향해 넘쳐흐른다. 교황은 이 광장의 신성성을 부정하고, 도시의 새로운 배꼽을 만들고자 했다. 분수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도시를 제대로 즐기려면 공간을 읽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 사실을 내게 가르쳐준 것은 지리학자 이현군이다. 옛 지도를 들고 함께 답사 여행을 했을 때, 이현군은 불쑥 마을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한번도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어느 마을이든 나무가 우뚝 선 곳이 입구다. 신성한 나무가 있는 곳, 거기에 선명한 금줄이 쳐져 있다. 마을 바깥에서 묻혀 온 세상의 먼지가 여기에서 나무의 신성한 힘으로 정화된다. 바깥으로 나갈 때도 마찬가지다. 나무는 세상에서 겪을 법한 험난한 위험에서 사람들을 지켜준다. 이 마을은 신성한 땅이다. 잡된 것은 모두 물러나라. 신의 자비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여기 있다. 우리나라 아파트 입구에는 큰 나무가 있다. 이곳은 마을이니, 사악한 것은 들어오지 말라는 선명한 표지다.
사는 모습은 빠르게 변해도, 사람 마음은 느리게 달라진다. 우리의 무의식에는 신성한 나무가 있다. 아파트 입구에 선 나무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하고 숙연해진다. 비로소 집에 왔다는 느낌이 든다. 이처럼 공간이 가장 보수적이다. 세부는 바뀌어도 구조는 그대로 남는다. 옛길은 넓어질 뿐 여간해선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옛 지도를 들고 여행해도 약간만 주의하면 길을 잃는 법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곳 사람들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도시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아마도 블로그나 구글 지도나 대다수 여행 안내서보다 훨씬 더 깊은 체험을 줄 것이다. 공간 구조를 읽으면 한 도시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한 도시의 진짜 삶은 골목에 있다
<짓기와 거주하기>에서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세넷은 도시를 빌ville과 시테cite로 나눈다. 빌은 건물, 도시 등으로 이루어지는 ‘물리적 도시’로 ‘짓기’의 대상에 해당한다. 그에 비해 시테는 삶의 질, 이웃과의 유대, 장소에 대한 애착 등이 어우러지는 ‘정신적 도시’로 ‘거주하기’의 대상이다. 빌과 시테가 서로 어긋날 때, 즉 ‘짓다’가 ‘살다’로 이어지지 못할 때, 하루를 사는 일이 하루를 견디는 일이 된다. 추억이 쌓이지 않는 공간, 사랑할 구석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은 인간을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든다. 집도, 동네도, 직장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더 이상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면, 우리는 한순간 극단적 외로움을 느끼고 떠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시테가 아닌 곳에서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광장은 한 도시 사람들 전체를 위해 빌을 시테로 만든다. 광장에 모여 신 앞에 기도도 하고, 집회를 열어 공동체의 문제를 논의하고, 축제를 개최해 즐겁게 함께 어울리고, 장을 세워 필요를 나누면서 인간은 도시에 정을 붙여가는 것이다.
빌을 시테로 만드는 또 다른 공간이 광장과 집을 연결하는 골목이다. 골목은 도로가 아니다. 도로는 정치적·경제적 목적에 복무한다. 도로에는 물리적 이동은 있으나 인간의 존재는 없다. 이에 반해 골목은 전적으로 인간을 위한 공간이다. 골목 사이에서 사람들은 우연히 만나 서로 안부를 살피고 대화하고 어울리고 뛰놀면서 하나로 삶을 엮어간다. 이질성과 대면하고 낯섦을 체험하는 것만이 창조의 촉매가 된다. 동어반복은 인생의 재미와 흥미를 빼앗아 간다. 골목의 삶이 없으면 인간은 자기 공간에서 소외된다. 사는 게 시들해지고 지루해진다. 일상의 공간에 즐거움과 놀라움이 없으니, 억지로 이벤트를 만들고 스펙터클을 찾아 발버둥 친다.
한 도시의 진짜 삶은 골목에 있다. 뛰어난 여행자는 광장에 뻗어나간 복잡한 골목을 즐길 줄 안다. 다양한 모양의 집이 맞물려 뽑아낸 거미줄 같은 골목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지나는 사람들을 살피고, 구석구석 숨은 가게를 구경한다. 눈에 띄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커피 한잔에 다리를 쉬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흥정해 여행을 기념한다. 무엇보다 오래된 골목에서 수백 년 동안 직을 이어가는 장인들을 사랑할 줄 안다.
내가 돈을 내고 맞춘 첫 구두는 볼로냐 광장 뒤 어느 골목에 있는 구둣방에서 만든 것이다. 명품을 사려고 부지런히 걷다가 마음에 쏙 드는 구두형을 우연히 발견했다. 여행 일정을 확인한 후, 장인은 나흘 만에 발등이 불쑥 튀어나온 내 발에 맞는 구두를 마련해주었다. 그 후 오랫동안 내가 그만큼 사랑한 구두는 없었다. 명품 숍이 빌의 공간이라면, 골목 안 구둣방은 시테의 공간이다. 명품으로는 못생긴 내 발등을 사랑할 길이 없다. 내 발에 맞추어 형을 연출하는 장인의 세밀한 정성을 통해서만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
공예의 미학자 윌리엄 모리스에 따르면, 노동은 좋은 노동과 나쁜 노동으로 나누어진다. 좋은 노동은 축복에 가깝고, 나쁜 노동은 저주, 즉 인생의 짐일 뿐이다. 둘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일이 희망이 되려면 적절한 휴식, 좋은 제품을 향한 의욕, 노동 자체의 즐거움이 필요하다. 뛰어난 물건은 이러한 세 박자를 모두 갖춘 곳에서 태어난다. 희망이 있을 때에만 인간은 비로소 정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일일이 제품 하나하나를 만들고, 적절한 휴식 속에서 일의 의미를 느끼며, 이 일이 삶의 긍지로 이어질 때에만 노동은 고역이 아니라 예술에 가까워진다. 힘을 다해 제품을 만들고 성심을 다해 판매함으로써 손님의 기쁨을 보고 하루 치 긍지를 얻는 일, 이것이 장인의 삶이다. 이들은 오직 ‘손의 힘’과 ‘인간의 마음’을 믿으면서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다.
오래된 도시의 골목에는 장인들이 가득하다. 골목을 즐기다 우연히 들어선 카페의 커피가 정말로 훌륭하고, 음식이 너무나 맛있으며, 물건이 넋을 빼놓는 경우가 얼마나 잦은가. 매끈한 제품의 균질성, 효율성과 무차별성보다 다채로운 장인성의 놀라운 풍요에 진짜 삶이 있다. 한 도시를 생활이 자연스레 넘쳐흐르는 시테로 경험하지 못했다면, 어떤 여행도 좋은 여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음의 소리굽쇠를 오랫동안 울리는 것은 빌이 아니라 시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