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스완슨
기이하고 낯선 동화의 세계
2020/12 • ISSUE 31
editorKim Jihye editor Jaeseok Kim 갤러리현대 디렉터
가을 하늘처럼 푸르른 배경에 느닷없이 등장한 사슴 한 마리. 뿔부터 발굽까지 온통 하얗다. 크리스털로 뒤덮여 조명을 비추면 거대한 디스코 볼처럼 보는 방향에 따라 환상적인 자태를 뽐낸다. 그 모습이 한가롭게 풀을 뜯다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려 주변을 살피는 것만 같다. 깊은 우물처럼 새까만 눈에는 호기심이 어른거린다.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작품의 한 장면, 혹은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에 등장할 법한 유령 같은 동물의 모습 같기도 하다. 살아 있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사슴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낯설고 신비로운 장면. 이 작품은 미국 작가 마크 스완슨의 2009년 작 ‘Untitled(standing deer upright sweep)’다. 작가는 2015년 볼드윈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전시장 벽면에 거울을 설치하고, 곳곳에 크리스털로 뒤덮인 사슴 몸체와 두상 조각을 놓아 무한 반사되며 끝도 없이 펼쳐지는 초자연적이며 우주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숲속과 디스코 클럽 사이
마크 스완슨의 작품에 등장하는 반짝이는 사슴은 매우 사적인 동시에 신화화된 존재라 할 수 있다. 1969년 뉴잉글랜드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한 작가는 퇴역한 해군이자 사냥에 열광하는 마초적인 아버지 밑에서 게이라는 성 정체성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초, 그는 미국 LGBT 공동체의 중심인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해 자립하며 그곳의 게이 문화와 클럽 신을 경험하지만, 어딘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는 듯 흡수되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방황과 머뭇거림의 순간, 경계에 서 있던 그는 크리스털로 뒤덮인 사슴 조각을 만들었고, 미술계에 점차 이름을 알렸다. 벽난로 위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전리품처럼 걸곤 하는 사슴 두상과 길게 자란 뿔은 그 자체로 작가가 나고 자란 보수적인 고향 환경, 아버지로 환기되는 힘과 남성성을 상징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대상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듯 작품에 반짝이는 크리스털을 뒤덮고 해방과 환락의 에너지로 전환한 것이다. 어쩌면 사슴은 작가의 자화상이었을지도 모른다. 2005년 그는 ‘Killing Moon’ 연작을 발표하는데, 온몸이 흰 털로 덮인 설인을 떠올리게 하는 반인반수의 모습이었다. 전시장 벽면에 기대어 앉거나 바닥에 엉거주춤 앉은 그들은 파괴적 힘을 지닌 괴물보다는 우울한 감성과 정서를 간직한 연약한 생명체처럼 보인다.
마크 스완슨의 조각에는 동물과 인간, 도시와 시골, 토템과 미술품, 자연과 문화, 하위문화와 고급문화, 남성성과 여성성 등 이분법적 개념이 팽팽하게 대치되거나 자연스럽게 융합된다. 경계란 늘 사람들을 자극하는 예민한 무엇일까. 그의 동화적 조형물은 종종 논란과 파괴를 불러오기도 했다. 2005년 미국의 드퍼대학교는 전도 유망한 동시대 미술가를 지원하기 위해 마크 스완슨의 ‘Fits and Starts’를 구매해 교정에 설치했다. 실물 크기의 사슴 형상에 수많은 인조 다이아몬드를 덮은 그의 시그너처 같은 작품으로, 사냥꾼에게 쫓기듯 두 앞발을 땅에 딛고 도약하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학생들이 ‘디스코 사슴’이나 ‘엘턴 존의 개’ 따위로 폄하하며 작품 일부를 훼손했고, 학교 측은 급기야 작품의 철수를 결정했다. 현재 이 작품은 보수 후 대학교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2015년 볼드윈 갤러리에서 선보인 설치 작품 ‘The Gilded Cage’ ©Marc Swanson
"마크 스완슨의 조각에는 동물과 인간, 도시와 시골, 토템과 미술품, 자연과 문화, 하위문화와 고급문화, 남성성과 여성성 등 이분법적 개념이 팽팽하게 대치되거나 자연스럽게 융합된다."
‘Untitled(Black Fighting Bucks)’,
Crystals, polyurethane foam, adhesive
©Marc Swanson
비밀을 간직한 사물들
마크 스완슨의 작품 세계에서 사슴이나 뿔, 반인반수 등 동물 형상과 함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것은 옷과 천, 조명 등을 사용한 설치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의 시각적 특징은 주로 뚜껑이 없는 박스를 프레임 삼고 그 안에 입다 버린 찢어진 티셔츠나 옷감을 장식하는 술, 금속 사슬을 늘어뜨린다는 것이다. 박스 형태에 빈티지 사진이나 일상용품을 뒤섞어놓는 제작 방식에는 요제프 보이스, 로버트 라우션버그, 조지프 코넬 등 선배 작가를 향한 그의 오마주도 담겨 있다. 관객은 비밀을 간직한 캐비닛을 열어본 것처럼 박스에 담긴 오브제를 통해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 나뭇가지나 나무틀에 흰 천과 술을 겹겹이 쌓아 석고로 굳혀 유령이나 미라처럼 만든 작품은 마치 새하얀 사슴과 설인의 영혼 혹은 구체적인 대상이 추상화된 이후의 모습으로 보인다. 작가는 이 작품에 미술사의 영웅뿐 아니라 아스타 닐센 같은 영화배우도 영감의 주인공으로 소환한다. 현재 박스라는 프레임은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의 형태로 전환되는 중이다.
많은 평론가는 마크 스완슨이 서로 다른 질감과 상징적 의미를 지닌 투박하거나 반짝이는 재료를 연금술사처럼 개성 있게 사용하며, 거기에 내면의 이야기를 결합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미술 전문지인 〈아트포럼〉의 편집장 데이비드 벨라스코는 “스완슨은 인생의 지저분함 속에서도 반짝이는 수수께끼 같은 토템을 만드는 데 탁월한 신화학자”라고 평가했다. 낡아서 쓸모를 다한 익숙한 오브제를 누군가의 사연을 간직한 비밀스럽고 신화화된 사물로 전환하는 마술적 힘. 그것이 마크 스완슨이 창조한 기이하고 낯선 동화적 세계의 매력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