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지혜를 얻을 때
2021/09 • ISSUE 39
writer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editorKim Jihye
"듣는 인간은 타자의 기쁨과 슬픔에 공명하고,
세계의 미세한 율동에 맞추어 춤출 줄 안다.
듣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다."
독락, 혼자서 그러나 함께 즐거움을 누리다
조정권의 시집 <산정묘지> 첫머리에 놓인 시다. 독락獨樂은 ‘혼자 즐기는 일’이고, 대월對月은 ‘달과 마주하다’라는 뜻이다. 아득한 벼랑 끝에 집 한 채 지어두고, 오로지 달을 대면해 사는 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그러나 시인은 외롭지 않다. 독락의 낙樂은 ‘함께 나누는 즐거움’을 뜻한다. 혼자 누리는 기쁨에는 열悅을 쓴다. 독락이란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혼자 그러나 함께’라니, 어쩌자는 것일까? 까마득한 벼랑 끝에 거처를 지어 머문다니, ‘혼자’는 쉽게 떠오른다. 하지만 길을 무너뜨려 속세와 인연을 끊었는데, 기쁨을 같이할 대상은 무엇일까. 누각 이름에 답이 있다. ‘달’이다.
대월對月은 당나라 때 이백의 시에서 나왔다. 이백은 ‘달 아래 홀로 술 마시다(月下獨酌)’에서 ‘홀로 즐기는 법’을 발명했다. “꽃나무 사이에 한 단지 술을 놓고/ 홀로 따라 마시네, 함께 잔을 나눌 사람 없어서./ 잔을 들어 올려서 밝은 달을 맞이하니/ 그림자와 함께 셋이 되었네.”
달밤에 시인은 홀로 꽃밭에 있다. 사방에는 아름다운 꽃이 가득하고, 달은 휘영청 하늘과 땅을 비춘다. 벗과 어울려야 마땅하나, 시인 곁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시인은 외롭지 않다. 달님을 맞이해 술을 나누고, 그림자와 더불어 꽃을 구경한다. 술 한 잔을 동시에 셋이 마시니 기쁨도 3배로 늘어난다. 이것은 신선의 경지다. 달을 벗 삼아 꽃을 즐기고, 바람과 짝지어 춤추는 사람은 절대로 외롭지 않다. 혼자 있어서 더 높은 즐거움에 이르니, 자유로운 그의 움직임을 따라서 고독은 고고가 된다.
듣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다
사실 독락, 즉 혼자 즐기는 일은 반시대적이다. 소셜미디어는 수다로 인기를 끌고, 플랫폼 기업은 평점과 댓글로 돈을 번다. 글도, 사진도, 좋아요도, 하트도, 댓글도 없는 인간은 아무 쓸모도 없다. 디지털 상호작용이 없는 인간은 무시당해야 한다. 독락하는 인간은 만인과 만인이 연결되어 한없는 수다를 반복하는 소셜미디어 시대의 적이다.
그런데 인간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도 외로울 수 있다. 일본의 시인 데라야마 슈지는 현대인이 ‘침묵’을 잃었기에 갈수록 공허하고 외롭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대화 상대를 계속 바꾸면서 일부러 더 깊은 커뮤니케이션을 피한다. 침묵도 수다도 잃은 ‘스피킹 머신’과 같이 ‘대화하는 것’과 ‘살아 있음’을 혼동하면서 나이를 먹어갈 뿐이다.”
소셜미디어는 인간을 ‘스피킹 머신’으로 만든다. 끝없이 수다를 떨지만, 우리는 더 외로워진다. 소셜 수다는 인간관계를 소모시키고, 심력을 고갈시킨다. 2015년 시카고대학교 연구 팀 발표에 따르면, 인터넷을 통한 사회적 연결은 늘었으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느끼는 외로움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양적 상호작용을 아무리 늘려도, 개인의 외로움은 별로 줄어들지 않는다.
문제는 속 깊은 대화의 부재다. 사람은 더 많이 말하지 못해서 외로운 게 아니라 자기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다. ‘수다 떠는 입’은 넘쳐나는데, ‘경청하는 귀’가 모자란 것이 우리 시대의 질병이다. 외로우니까 목소리 높여서 열심히 말하는데, 이상하게도 열렬히 말할수록 외로워진다. 말하면서 쏟아내기만 하고 귀 기울여 들여오는 것은 없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내면은 비어간다. 독락하는 사람은 수다쟁이와 반대였다. 침묵을 택했으나 천지에 가득한 달빛과 우주를 노니는 바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에 그는 결코 외로울 수 없었다. 끝없이 말하는 이는 외로우나 듣는 사람은 인생이 즐겁다.
진화의 역사에서 귀는 눈보다 먼저 생겨났다. 귀는 외부의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는 기관이다. 공기 파장이 변하고 유체 흐름이 바뀔 때, 귀는 민감하게 이를 포착한다. 빛이 없는 동굴에서 눈은 소용없으나 귀는 여전히 작동한다. 잠들어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눈이 닫혀 있어도 귀는 열려있다. 청각은 항상 세계와 타자에 예민하다. 듣는 인간은 타자의 기쁨과 슬픔에 공명하고, 세계의 미세한 율동에 맞추어 춤출 줄 안다. 듣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다.
듣는 마음이 최고의 지혜다
‘듣다’를 히브리어로 샤마shama, 헬라어로 아쿠오akouo라고 한다. 샤마는 ‘지혜를 얻으려고 귀를 내주는 일’이다. 아쿠오는 후파hupa(아래)와 결합해 후파쿠오hupakouo의 형태로 자주 쓰인다. 자기 말이 먼저 들리는 사람은 내면의 귀가 열린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후파쿠오, 즉 자기를 낮추어 아래로 가서 들으라는 것이다. 신적인 지혜는 ‘듣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의 일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양 1천 마리를 신에게 바쳤다. 기도를 들은 신이 그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솔로몬은 신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레브 샤마leb shama,즉 ‘듣는 마음’을 뜻한다. 지혜는 이성적 똑똑함이라기보다 남의 말을 잘 듣고 진실을 분별하는 힘이다. 지혜는 자기 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존재한다. 세계의 진동에 민감한 사람만이 지혜로울 수 있다. 귀 있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수천 년을 이어온 히브리 지혜의 비밀이다.
"솔로몬은 신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레브 샤마leb shama, 즉 ‘듣는 마음’을 뜻한다."
자연의 소리를 즐기며 무욕의 삶을 꿈꾸다
승지를 제대로 즐기려면 계곡을 따라 마을로 가야 한다. 개울가 바위 사이로 아슬아슬 난 길을 지나 나무 사이로 은근슬쩍 이어진 오솔길을 도는 길이다. 구글 지도를 보면 옥산서원 쪽에서 계곡을 따라 바위로, 숲으로 이어진 길에 흔적이 있다.
청년 시절 이언적이 처음 이곳에 집을 지었을 때 역락재亦樂齋라 명명했다. 옛사람들은 건물에 이름을 함부로 붙이지 않았다. 역학이 독락으로 바뀐 데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역락亦樂은 <논어>에서 온 말이다.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친구는 두 종류로 나뉜다. 붕朋은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사람’을 뜻하고, 우友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언적이 기다린 것은 우友가 아니라 붕朋이었다. 궁벽한 곳까지 일부러 찾아와서 함께 학문을 논하고 세상을 구제할 길을 도모할 동지였다. 역락의 뜻은 지금도 옥산서원 문에 새겨져 있다.
스물여섯 해 후, 중년의 이언적은 화를 피해 이곳에 은거하면서 건물을 새로 짓고 독락이라 불렀다. 계곡 가엔 양직암養直菴이라는 정자도 지었다. 지금은 계정溪亭으로 불리는 곳이다.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계곡물과 기이한 암석의 풍취를 만날 수 있다. 독락이라니, 무엇을 혼자 즐기려는 것인가.
독락은 <논어>의 그다음 구절과 이어진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면, 역시 군자답지 않은가(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독락에는 군자의 포부가 담겨 있다. 세상 인심은 무상하다. 권력과 척지자 벗들이 발길을 끊고 삽시간에 외로워졌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몰라주어도 나는 화내지 않겠다, 이 길에 올곧은 도가 있음을 알기에 나는 차라리 홀로 즐기는 쪽을 택하겠다, 흐르는 물과 듬직한 바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양직養直, 즉 자신을 곧게 가다듬어 가겠다. 독락과 양직에는 군자 됨의 다짐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대월루는 어디에도 없다. 이 집은 시인이 지은 상상의 집이다. 시인은 독락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아득한 절벽 위 높다란 대를 세우고 길을 무너뜨려 세속으로 돌아갈 길을 아예 차단해버렸다. 일찍이 이백이 그러했듯 무욕 속에서 오직 달을 벗 삼아 홀로 정신을 벼리는 고고한 삶을 다짐한 것이다. ‘저물녘 산속에서 갑자기 감회가 일어’에서 이백은 다시 달과 함께 독락의 밤을 노래했다. “달은 누각 사이 봉우리를 머금고,/ 샘물은 섬돌 아래 돌을 씻어 내리네./ 깨끗한 마음을 이로부터 얻나니,/ 참된 즐거움은 바깥에서 오는 게 아니라네.” 마음을 정화하는 소리는 바깥에서 오지만, 여기에 귀 기울여 홀로 즐기는 마음은 안에서 일어난다.
독락대월獨樂對月, 네 글자와 함께 나는 생각한다. 이백이 신선을 보고, 이언적이 참된 즐거움을 만났으며, 조정권이 정신의 칼을 벼렸던 그 드높은 경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