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이름처럼 살다
2021/11 • ISSUE 41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는 이불의 개인전이 열린다. 1988년 첫 개인전부터 주목받은 그는 기존 미술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영역의 탐험자이자 개척자로서 멈춤 없이 달렸다. 따라서 이불의 작업 세계는 룰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미술의 영역을 확장하고 경계를 해체하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writerHwang Suk-kwon 〈월간미술〉 편집장
editor Jang Jeongjin
photographerKim Cham
"저는 시그너처에 안주하는 것을 너무 싫어해요. 어느 순간 내게 너무 쉬워지면
무한대로 뽑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흥미를 잃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일 뿐이라서요.
그래서 저는 작업에 임할 때 가능과 불가능을 따져가며 시도하지 않습니다.
계속 실패하면서 어느 순간 거기서 일종의 빛을 발견하는 거죠."
BB&M 갤러리 〈이불〉 개인전 전시 전경
©Jeon Byung-cheol. Courtesy of BB&M
이불 작업의 특징을 단순히 파격이나 표현의 극단화,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에 위치했다는 등등의 흔한 수식어로 치장하기에는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다. 세상 어느 분야든 공고한 권력의 위계를 ‘질서’라는 말로 위장한다. 특히 예술 분야의 발전과 흐름을 일궈낸 일련의 사건은 항상 기존 질서를 따르지 않는 이단아의 출현으로 가능했는데도 말이다. 이불이 동시대 한국 미술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순응보다는 저항과 투쟁으로 쟁취했고 사회의 강압을 온몸으로 밀쳐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한국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언어로 이뤄지기에 인정받고 있다.이불이라는 이름을 가명이나 작가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옅은 미소를 띠며 시작한 그와의 대화는 시종일관 잔잔하고 진지한 분위기로 흘렀다. 성북동에 새로 개관한 BB&M갤러리 테라스에 조촐한 인터뷰 자리가 마련됐다. 이 갤러리의 개관전인 이불의 개인전은 10월 15일부터 11월 27일까지 열린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그의 평면 작업 〈Perdu〉(2021)와 공중에 매달지 않은 바닥 설치 작업 〈Still〉(2004),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출품한 〈AubadeⅤ〉(2019)를 축소한 〈Study for Aubade Ⅴ(1/5 Scale)〉(2019) 등 13점을 만나볼 수 있다.
©Getty Images, Scala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날 일(日) 변을 쓰는 글자로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제 이름(불昢)은 새벽 혹은 동이 트는 때를 의미합니다.맞아요. ‘날 일(日)’과 ‘날 출(出)’이 조합된 단어입니다. 좀처럼 쓰이지 않는 한자어입니다.
독특한 이름은 살아가면서 관계를 맺는 이들에게는 놀림의 대상이지만 자의식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죠. 또 저는 농담삼아 제 이름이 전위, 아방가르드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이름 덕분에 요즘 시대에 말하는 캐릭터가 처음부터 만들어진 거죠.
운동권 부모님이 한때 피신 생활을 하셨는데 강원도(영월)와 경상도(영주)의 접경 지역이었어요. 그곳에서 제가 태어났고 바로 서울로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왼손잡이에다 이름도 그래서 또래들에게 놀림의 대상이었어요. 여러 번 이사하다 보니 딱히 친구를 만들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전형적인 마이너리티 성향이 형성된 것 같아요. 자라면서 연좌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겠다는 인식이 생겼고, 그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대에 진학했죠.
작가란 재능을 갖고 태어나 노력으로 이룩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기대 이하였어요. 성공한 작가가 되려면 어떤 룰에 따르고 코스를 거쳐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그만두려고도 했습니다. 그때 평소 관심 있었던 연극을 하게 됐죠. 배우로서는 재능이 없어 연출을 하려 했는데, 부조리극이나 실험극 희곡을 대하다 보니 나중에 작업과 연결이 되더라고요. 제가 보니 잘 묶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강박이 있어요. 저는 작업을 하면서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스튜디오에 보관돼 있는 몇 년 전 작품을 느닷없이 꺼내서 고치기도 하고, 다른 재료를 덧입히기도 하고, 심지어 제목도 바꾸곤 하죠. 저는 작업의 끝을 모르기에 어느 시간에 멈췄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간혹 바꿔버린 작품으로 전시를 열기도 했어요. 또 언젠가 제 작업실이 홍수 피해를 입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기록이나 메모를 하는 강박이 생겼죠.
네. 그런데 앞서 말한 기록이나 메모를 아무 데나 끼워놓았다가 발견하면 마치 선물을 받은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새로운 작업의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도 제 강박 중 하나인데, 시그너처에 안주하는 것을 너무 싫어해요. 어느 순간 내게 너무 쉬워지면 무한대로 뽑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흥미를 잃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일 뿐이라서요. 그래서 저는 작업에 임할 때 가능과 불가능을 따져가며 시도하지 않습니다. 계속 실패하면서 어느 순간 거기서 일종의 빛을 발견하는 거죠. 제 작업이 연작수가 많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적당할 때 다른 곳으로 건너뜁니다. 그렇다고 다른 차원으로 가는 것은 아니고요.
"기록이나 메모를 아무 데나 끼워놓았다가 발견하면
마치 선물을 받은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새로운 작업의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Untitled(Willing To Be Vulnerable–Velvet #15)〉, 2021,실크 벨벳에 자개, 아크릴릭, 콜라주, 130×180×3.5cm (147×197×12cm framed)
©Jeon Byung-cheol. Courtesy of the artist
그런데 어떤 분들은 오해하시는 경우도 많아요.(웃음) 배신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딱 맞는 키를 찾으려 해서예요. 예를 들어 제 작업에서 페미니즘적 요소를 발견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업도 상당하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는 것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 스스로를 아주 간단하게 한마디로 (정의)하면 너무 간단해져서 아무것도 지칭할 수 없게 돼요. 깊이 들여다보면 삶이 그렇게 단순치 않잖아요.
아시아에서 태어난 이들은 항상 정체성을 요구받아요. 얼토당토않는 카테고리로 사람을 옥죄는 거죠. 저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했던 퍼포먼스 작업을 통해 그 질문과 대답을 스스로 얻었다고 생각해요. 그건 제가 공부한 것이었죠.
어떤 조건 없이 그냥 내 작업을 내가 보여주고 커뮤니케이션하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고 싶었어요. 기존의 권력 체계로 들어가기 싫어서요. 전시를 개최할 장소 섭외부터 전시, 이벤트, 카탈로그 제작 등 모든 과정을 우리가 했어요. 뮤지엄의 등장은 이전 세대와의 한 번의 단절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른바 ‘운동movement’은 아니었어요. 구성원의 성향도 그러해서 몇 번 전시를 개최하고는 해산한 거죠.
한국 근현대사를 주제로 작업하는 데 흥미를 갖고 있죠. 〈Aubade Ⅴ〉
이전부터 이미 스터디했던 작업이에요. 작품 수는 많지 않은데 평면과 입체 작업은 거의 병행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어딘가에 넣어두었던 스터디 작업을 왕창 찾은 거죠.(웃음) 컬러가 있고 평면 작업처럼 보이지만 정확하게는 조각이에요. 제 작업 중 사이보그나 아나그램 조각이 일종의 시그너처가 됐다고 생각해서 과감하게 그 반대로 시도해보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