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크레텐
예술과 인간의 서사를 빚다
2020/9 • ISSUE 28
editorKang MinjeongwriterKang Minjeong 닻미술관 학예실장
View of the exhibition
요한 크레텐(Johan Creten, 1963~)은 도예(ceramics)가 공예의 범주에서 벗어나 감각적인 현대미술로 안착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독창적인 형태와 색을 도예에 적용함으로써 현대미술과 도예의 한계를 깨뜨리고 미술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었다. 매혹적인 외형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크레텐의 작품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표면의 독특한 질감이 두드러지며 시각에서 촉각으로 감각을 확장시킨다. 또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드라마틱하게 전환되는 입체감은 작품의 매력을 증폭시켜 감상자의 시선을 좀 더 오래 붙든다. 그의 작품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작품에서 전해지는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도예로 넘어선 시대와 전통
크레텐이 처음 도예에 매료된 시기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벨기에에서 태어난 크레텐은 헨트에 있는 왕립예술학교(Royal Academy of Fine Arts)에서 회화를 공부하던 중 도예수업에 참여하며 흙(clay)의 매력에 빠진다. 당시 벨기에 미술계는 개념미술,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던 시기로 작가의 ‘손’이 적극적으로 개입되는 도예는 현대미술에서 배제된 매체였다. 이미 도예의 세계에 들어선 크레텐은 어려운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그가 도예를 공예가 아닌 미술로 접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크레텐은 스스로를 도예가가 아닌 미술가로 칭하고, 실용적 상품이 아닌 미술관과 갤러리에 전시될 작품으로 도예 조각을 창작해 예술가의 길을 이어나간다.
크레텐의 작품은 전통적인 도예와도 차이를 드러냈다. 작품 표면에서는 의도치 않게 생긴 틈, 긁힌 자국이 눈에 띄고, 유약이 흐른 흔적과 기포는 그대로 굳은 채 전시장에 놓였다. 이 같은 마감 처리는 전통적 도예에서는 금기시되는 것이었다. 그는 가마에서 생겨나는 예기치 못한 흔적을 작은 기적이라 부르며 “내가 도예를 사랑하는 이유는 나의 컨트롤을 넘어선 마지막 제스처 때문”이라고 말한다.
‘Odore di Femmina’는 크레텐이 도예를 시작한 때부터 30년 가까이 지속해오고 있는 대표 시리즈로, 여성의 향을 뜻하는 작품 제목은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의 대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매번 조금씩 바뀌는 미묘한 형태는 여성의 토르소를 상징하고, 표면을 뒤덮은 꽃잎 모양의 다채로운 자기는 아름다운 한편 거칠고 날카로워 유혹하는 듯하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이중성을 지닌다. 이처럼 30년 전부터 도예와 조각의 경계를 허물고 독창적 예술을 선보여온 크레텐은 일찌감치 시대와 전통을 넘어선 진정한 예술가였다.
고전적 영감으로 완성한 현대적 감각
네덜란드에 있는 베일던 안 제이 미술관(Museum Beelden aan Zee)은 2018년 6월 크레텐의 개인전
그는 어린 시절 골동품 수집가 레오나르드 부부의 집을 드나들며 예술과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이때부터 시작된 역사적 예술품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한 예로 ‘Grande Vague pour Palissy’ 시리즈는 16세기 프랑스 도예가이자 학자 베르나르 팔리시(Bernard Palissy, 1510~1589)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팔리시는 동식물 형태를 본떠 제작한 도예 작품으로 유명한데, 크레텐은 식물을 거대한 파도 형태의 도예로 구현해, 재생과 순환이라는 자신만의 창의적 해석과 과감한 감각을 덧입혔다.
아티스트 노매드로도 불리는 크레텐은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미국 등 여러 나라의 도시를 여행하며 작업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10여 년 전부터 정착해 자주 오가는 파리 아틀리에는 그의 호기심과 영감을 자극하는 역사적 예술품으로 가득하다. 환상적인 16세기 태피스트리가 벽면 가득 펼쳐지는가 하면, 곳곳에 놓인 르네상스와 바로크 조각은 우아한 고전미를 뽐낸다. 근원적이고 야생적인 원시 조각과 박제 동물은 상상과 긴장으로 공간을 제압한다. 예술가이자 컬렉터로서 수집하는 이 같은 고전적 영감은 크레텐의 현대적 감각을 거쳐 때로는 작품의 외형으로, 때로는 작품에 내포된 이야기로 재탄생된다.
"크레텐은 스스로를 도예가가 아닌 미술가로 칭하고, 실용적 상품이 아닌 미술관과갤러리에 전시될 작품으로 도예 조각을 창작해 예술가의 길을 이어나간다."
Johan Creten, 'Grande Vague pour Palissy', 2006/2011.
©Gerrit Schreurs & Johan Creten Studio. Courtesy Perrotin
예술로 함축한 인간의 서사시
구상과 추상의 형체가 섞인 크레텐의 작품은 마치 한 편의 시와 같다. 시는 그 자체로 아름다우면서도 행간에 숨겨진 이야기로 더욱 신비롭다. 작품의 행간에는 그의 폭넓은 관심사가 함축되어 있는데, 크레텐은 역사적 예술품을 수집하는 것 외에 미술사, 오페라, 문학 등 사회 문화 전반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내러티브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네덜란드의 도시 볼스바르트 야외에 설치된 ‘De Vleermuis’는 크레텐이 2018년 네덜란드 11개 도시에 예술가들이 각각 분수를 설치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제작한 작품이다. 박쥐 형상의 청동 조각은 사람들이 직접 올라탈 수 있게 제작해 예술 작품의 경계를 허물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작품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는데, 아시아권에서 박쥐가 행운, 장수를 의미하는 반면 서구권에서는 해롭고 어두운 기운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논란을 통해 작품은 상징과 미신 등 인간과 문화의 관계에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또 크레텐의 대표작 중 하나인 ‘Pliny’s Sorrow’는 권력과 자연에 대한 고찰을 담는다. 대大 플리니우스(Pliny)는 자연계를 아우르는 박물지를 저술한 로마 시대 박물학자이자 정치가, 군인으로 크레텐은 제목을 통해 이중적 의미를 드러냈다. 권력을 상징하는 독수리 형상은 사실 날아가지 못한 혼종 새로 자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화려한 금빛으로 시선을 압도하는 도예 부조 작품 ‘Glory’ 시리즈는 종교성을 넘어 현대 도시의 활기를 이야기하고, ‘Aus Dem Serail’은 여성과 인종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건넨다.
크레텐은 결국 고대부터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인간의 서사를 순수 예술로 함축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오랜 시간 감상하며 매혹적인 베일이 서서히 벗겨지길 기다려야 한다. 시대와 전통을 넘어 도예를 주요 매체로 택한 크레텐은 흙이 속세로서의 땅이자 신성으로서의 대지를 상징하듯, 성과 속을 오가는 인간 근원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ARTIST PROFILE
요한 크레텐 Johan Creten
벨기에 출신의 예술가 요한 크레텐은 멕시코, 뉴욕, 유럽 등 다수의 도시를 여행하듯 떠돌며 ‘노매드 예술가’로 작업한다. 대표작인 거대한 독수리 조각 ‘Pliny’s Sorrow’로 유명하며 컬렉터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오는 10월 15일부터 내년 1월 말까지 로마 메디치 빌라에서 〈I Peccati Johan Creten〉이라는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