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열음의 ‘겨울나그네’
2021/01 • ISSUE 32
writerChoi Jeongdong 〈중앙일보〉 기자
‘겨울나그네’는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의 HMV 1962년 녹음을 최고로 치는 애호가가 많다. QR코드로 감상할 수 있다.
‘겨울나그네(Winterreise, D.911)’는 슈베르트의 대표작이자 서양음악의 걸작이다. 그러나 친해지기는 쉽지 않다. 독일어 가사로 24곡이나 이어지는 연가곡連歌曲은 오래 공을 들여야 곁을 준다. 한국인은 어린시절에 배운 5곡 ‘보리수’ 정도가 귀에 익을 것이다. 클래식 애호가 중에도 ‘겨울나그네’를 즐기는 수준에 이른 사람은 흔치 않다.
평창대관령음악제 예술감독인 피아니스트 손열음도 이 점에 주목한 것 같다. “너무 유명한 곡이지만 동시에 모호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겨울나그네’를 다양한 형식으로 보여주고 들려줘 모호함을 깨뜨리자.” 해법은 현대무용가 김설진과의 합동 공연이었다. ‘겨울나그네’가 원래 바리톤이 피아노 반주로 노래하는 작품이니 바리톤 가수 조재경에게 중심 역할을 맡겼다. 거기에 독일도르트문트 소년합창단의 두 보이 소프라노, 낭송자 손결,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가 가세했다. 무용가 김설진은 시종 몸으로 슈베르트를 해석했다. 손열음은 24곡 전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며 무대를 이끌었다. 이렇게 특별한 ‘겨울나그네’ 공연은 2019년 2월16일 평창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무용가 김설진이 등장했다. 악보가 어지럽게 흩어진 책상 옆에 비틀거리며 선 그가 잔에 술을 따랐다. 술이 넘쳐 바닥을 적셨다. 피아노는 6곡 ‘흘러넘치는 눈물’을 연주한다. 음악이 7곡 ‘냇가에서’로 바뀌었지만 술은 계속 넘친다. 8곡은 ‘회상’. 술이 흥건한 무대에 김설진이 쓰러져 회한에 몸부림친다. 연체동물 같다. 나는 그때까지 김설진을 몰랐는데, 팝핀 댄스를 추는 내 아들은 그가 Mnet 〈댄싱9〉 무대의 전설이었다고 했다. 9곡 ‘도깨비불’은 낭송이다. 빌헬름 뮐러의 시를 손결이 낭랑한 목소리로 읽는다. ‘겨울나그네’ 가사가 독일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낭송자 얼굴이 무대 가운데 창문에 떴다. 액자 같다. 그가 말한다. “우리의 슬픔도 기쁨도, 도깨비불의 장난일 따름.” 11곡 ‘봄의 꿈’은 달콤한 꿈과 쓰라린 현실이 교차한다. 나그네는 꽃이 만발한 5월의 들판을 걷다 닭 울음에 잠이 깨고, 다시 잠들어 사랑하는 소녀와 키스를 하다 또 닭 울음에 깬다. 슈베르트는 조성調性을 달리해 꿈과 현실을 또렷이 대비시켰다. 손열음은 이 노래를 보이 소프라노와 바리톤이 번갈아 부르게 했다. 12곡 ‘고독’에선 반도네온이 등장하고 가사는 다시 낭송이다. 반도네온의 처량한 음색이 시와 잘 어울린다. “하늘은 맑고 온 세상 그토록 밝은데, 내 가슴속엔 무슨 비바람 이리도 거세게….”
손열음의 ‘겨울나그네’는 이렇게 다양한 방식을 번갈아 사용하며 끝까지 내달았다. 70분이 금세 흘렀다.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에서 반도네온이 한 번 더 등장했다. 꽁꽁 언 겨울, 맨발의 노인이 안간힘을 다해 연주하던 악기는 손풍금인데 반도네온과 소리가 흡사하다. ‘거리의 악사’가 끝나자 청중의 머리 위로 하얀 악보가 눈처럼 쏟아졌다.
평창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나는 운전을 하며 테너 이언 보스트리지가 부르는 ‘겨울나그네’를 들으며 예습했다.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같은 음반으로 복습했는데, 느낌이 많이 달랐다. 흐릿하고 모호하던 디테일이 선명해졌다고 할까. 손열음은 이런 걸 바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