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가장 깊은 체험은
냄새의 형태를 갖고 있다
2021/02 • ISSUE 33
지구는 냄새의 행성이다. 자연에는 ‘후각적 진공’이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이 꽃 피우고 열매 맺을 때, 동물이 먹고 마시고 배설할 때, 광물이 부서져 내릴 때 냄새 풍경은 한없이 달라진다.
writer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editor Kim Jihye
여행이란 풍경을 정경으로 바꾸어가는 시간이다
바탕 화면에 사진 한 장이 깔려 있다. 몇 해 전 이맘때, 아내와 여행 갔을 때 사진이다. 화면 가득 온통 눈이다. 축령산이다. 비탈에는 편백나무가 하늘로 곧게 뻗어 있다. 무릎 높이까지 쌓여 지상을 평평하게 덮은 눈이 나무의 화살 같은 수직을 더 돋보이게 한다. 들이켤 때마다 맑고 찬 공기가 텁텁한 입안을 씻고 더러운 허파를 세척한다. 피가 한 방울 한 방울 맑아지는 느낌이다. 숲을 빙 두르는 한 줄기 길이 앞뒤로 길게 뻗어 있을 뿐 어느새 인기척은 모두 끊어졌다. 각자의 힘만큼, 각자의 속도로 걷고, 각자의 기억을 담는다. 숲 걷기의 규칙이다.
걸으면서 생각한다. 풍경風景과 정경情景은 다르다. 풍경은 바람, 즉 지구의 힘이 만드는 사물의 잠정적인 배치다. 바람은 물, 불, 나무, 쇠, 흙을 이리저리 주물러 세계의 형태를 끝없이 다시 만든다. 바람 불 때마다 어지러이 눈이 날리고, 햇살을 만나 공중에서 반짝거린다. 움직이지 않는 풍경은 없다. 어느 한순간의 풍경도 우리 삶에서 다시 만날 수 없다. 반복은 없고 변화만 존재한다. 이것이 풍경의 역학이다.
정경은 정情, 즉 마음의 힘이 이룩하는 사물의 배열이다. 무한히 생성하는 세계에 맞서서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든 간직해보려는 욕망이 빚어내는 경치다. 굽은 숲길 너머에서 아련히 식구들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이 스무 살 넘은 순간부터, 언제나 이번 여행이 마지막 가족 여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떠난다. 수건 반 장 크기로 태어난 아이들이 여섯 자 크기로 자라 스스로 제 시간을 꾸려나갈 때가 되었다. 억지로 일정을 맞추는 일도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다. 넷이 하는 마지막 외식, 넷이 하는 마지막 여행, 넷이 하는 마지막…. 슬프지만 당연하다. 집착은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다. 마지막이란 생각은 늘 사람을 정성스럽게 한다. 사나흘 정해진 시간에 좋은 경치, 맛있는 음식, 훌륭한 잠자리를 잘 준비하는 것은 아직은 어른의 일이다. 이 아름다운 숲에 들르자고 한 것은 아내다. 며칠째 주변 친구들한테 묻고 이리저리 검색하더니 이곳으로 가족을 이끌었다. 하루 종일 걷고 싶은 곳이다. 반나절은 너무나 짧고 아쉽다.
여행이란 풍경을 정경으로 바꾸어가는 시간이다. 시간의 강물에 무참히 몸을 맡기는 대신 순간순간 의미를 불어넣어 기억의 둔덕을 쌓고, 쌓인 기억을 오밀조밀 엮어 추억할 만한 멋진 이야기를 써나간다. 바탕 화면에 한 장 사진으로 남은 이 시간에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눈 덮인 자작나무 숲이 특이할 뿐, 흔한 겨울 풍경 사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이 사진은 무수한 이야기가 메아리치는 장소가 된다. 산다는 것은 무정한 세계에 정을 덧붙여가는 일이다. 일찍이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보여주었듯, 인생의 가치는 오로지 얼마나 많은 추억이 있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현대 문명에는 코가 없다
편백나무는 냄새가 무척 강하다. 입으로 들어오고, 코로 파고들며, 피부로 스며든다. 무색무취한 눈은 색이 없어 나무의 푸름을 선명하게 하고, 땅과 풀의 온갖 냄새를 덮어 편백나무 냄새를 오롯하게 만든다. 가만히 숲길로 들어가 눈을 감고, 나무를 끌어안은 후 큰 숨을 들이켠다. 짙은 나무 냄새가 머리는 청량하게, 마음은 고요하게 만든다. 숲은 좋은 기운으로 가득하다. 냄새의 물리학은 이 기운에 피톤치드phytoncide라는 이름을 붙였다. 피톤phyton은 ‘식물’이라는 뜻이고, 치드cide는 ‘죽이다’라는 뜻이다. 피톤치드는 나쁜 기운을 무찔러 자신을 보호하는 식물의 힘이다. 숲은 고장 난 인간을 고친다. 냄새를 통해 면역을 증진하고, 스트레스를 줄여주며, 들뜬 몸을 가라앉혀 마음에 평화를 일으킨다.현대인들은 흔히 냄새와 향기를 구별한다. ‘향기롭다’를 찬양의 언어로, ‘냄새나다’를 경멸의 언어로 쓰려 한다. “아주 오래된 무말랭이 냄새”, “행주 삶을 때 나는 냄새”, “무슨 냄새인지 잘 설명할 순 없지만, 지하철 타는 사람들한테 나는 그 이상한 냄새” 등 몇 마디 대사로 영화 <기생충>은 사회의 격차가 어떻게 감각의 격차로 나타나는지 선명히 보여준다. 자신을 ‘냄새 없는 인간’으로 여기고 타자의 냄새를 멸시하는 ‘후각적 귀족주의’야말로 우리 사회의 선연한 상징이다.
현대 문명에는 코가 없다.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에서 칸트는 말한다. “생물의 감각 중 가장 천박하면서 없어도 되는 감각은 후각이다. 냄새를 즐기는 데는 교육이 필요하지도 않고 감각을 다듬을 필요도 없다. 게다가 즐거운 냄새보다는 역겨운 냄새가 훨씬 많다. 붐비는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향기로운 냄새를 만났을 때조차 그 기쁨은 덧없고 일시적이다.” 놀랍지 않은가. 냄새는 야만이다. 우아한 것에는 냄새가 없고, 천박한 것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난다. 후각은 우리 감각 교육의 체계에서 배제되어 있다. 건강검진에서는 시력을 측정하고, 색맹을 따지고, 청력을 확인한다. 또 혀를 단련해 좋은 맛을 감별하는 훈련을 한다. 그러나 칸트는 후각은 따로 교육이 필요하지도 감각을 세련되게 다듬을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후각은 없어도 그만이라는 극언까지 퍼붓는다. 현대사회는 인간의 코를, 냄새의 풍요를 빼앗는다. 도시에서 우리가 불행한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반대였다. “모든 것이 연기가 된다 해도 우리 콧구멍은 그것을 구분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각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감각이다. 눈은 보이는 것만 인지하지만, 코는 보이지 않는 것도 알아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도 이상한 냄새가 나면 먹지 않는다. 아름다운 경치도 불쾌한 냄새와 함께라면 전혀 즐겁지 않다.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기 전에 먼저 코를 킁킁거려 좋고 나쁨을 구별한다. 후각은 감각의 왕이다. 시각과 미각과 촉각에 우선한다.
감기에 걸리면 입맛이 없다고 한다. 당연하다. 맛은 혀에서만 느끼는 게 아니다. 막힌 코는 혀의 감각을 둔화시킨다. 음식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맛의 거의 전부를 결정한다. 와인은 마시기 전에 반드시 향기부터 맡는다. 알코올에 녹아 있는 냄새를 음미할 줄 모르는 인간은 와인 맛도 알지 못한다. 사랑도 후각의 향연이다. 시각은 부차적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달콤한 냄새를 낸다.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연인의 살 냄새와 와 닿는 피부의 감촉은 사랑의 힘을 폭발시킨다. 냄새를 잃으면 많은 것이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현대의 도시들은 냄새의 풍요를 체계적으로 박탈한다. 우리는 향기라는 이름이 붙은 몇 가지 냄새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냄새나는 것들을 우리 곁에서 쫓아내는 중이다. 독특한 냄새 탓에 거리에서 무참히 베어지는 은행나무는 우리 문명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설령 마음을 끄는 좋은 냄새가 나더라도, 우리는 곧바로 싫증 내거나, 아무 일 아닌 듯 무시한다. 온갖 ‘먹방’을 보라. 음식 냄새를 세세히 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형용사나 부사를 살펴보아도 냄새 관련 단어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명사 뒤에 단지 냄새를 덧댄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 문명의 후각적 침묵이 후각 언어의 미분화를 가져온 것이다.
물론 후각적 배제가 완전하지는 않다. 후각은 모든 감각의 근본이어서, 인간은 냄새 없이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엄마 향기’는 도저히 ‘엄마 냄새’를 대체하지 못한다. ‘사람 냄새’를 ‘사람 향기’로 바꾸어 쓸 수 없다. 아로마테라피, 아로마 마케팅 등 주변을 메워가는 온갖 형태의 ‘아로마’는 삶에서 냄새를 돌려받으려는 우리의 갈망을 드러낸다. 인간의 가장 깊은 체험은 냄새의 형태를 띤다. 오래도록 기억나는 여행은 흔히, 의식하든 안 하든, 강렬한 냄새를 동반한다. 여행이 음식의 형태로 남곤 하는 이유다. 풍경보다 음식이, 아니 냄새가 더 길게 몸에 남는다. 홍차 냄새와 마들렌 맛에서 촉발된 인생 추억 수천 쪽을 남긴 프루스트는 고백한다. “그날이 오면 영혼은 전율하고 우리를 부르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 우리 덕분에 해방된 영혼은 죽음을 정복하고,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 돌아온다.” 추억은 죽음을 정복한다. 냄새의 압축률은 이미지를 압도한다. 냄새가 함께할 때 풍경은 가장 심오한 의미의 정경이 된다.
세계의 변화는 냄새의 형태로 일어난다
지구는 냄새의 행성이다. 자연에는 ‘후각적 진공’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고유한 냄새의 주파수를 갖고 있다. 동식물은 물론이고 인간도 마찬가지다. 식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 동물이 먹고 마시고 배설할 때, 흙 속 미생물이 동식물의 사체를 분해할 때, 광물이 부서져 허공에 흩날릴 때 냄새 풍경은 한없이 달라진다. 냄새를 빠뜨린다면, 지구도 알지 못한다.
<아로마: 냄새의 문화사>에 따르면, 인도 안다만제도에는 ‘냄새 달력’이 있다. 사시사철 꽃이 피는 이 섬 사람들은 한 해의 순환을 철 따라 공기를 가득 채우는 꽃 냄새의 변화로 표시한다. 에티오피아 다시네치 사람들 역시 냄새를 통해 계절 변화를 표현한다. 바싹 마른 풀, 농익어 썩은 과일, 불타는 들판의 냄새가 만연한 시절이 건기다.
세계의 변화는 언제나 냄새의 형태로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 현대인 대부분은 냄새 풍경을 좇지 못하는 후각적 무능력자에 해당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냄새를 억누르고 표백하고 침묵시킨다. 우리는 자연의 진정한 풍요를 누리지 못한다. 눈은 미약하고 혀는 허약하다. 바람에 섞여 날리는 나무 냄새를 소나무, 잣나무, 편백나무, 참나무 등으로, 더해서 시절에 따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꽃 냄새, 풀 냄새도 다르지 않다. 눈으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기에 우리 기억은 시간의 공격을 잘 견디지 못한다. 단단한 기억은 중첩된 감각으로 이루어진다. 냄새를 바탕 삼아 온몸이 기억하는 감각만이 세월이 흐른 후에도 생생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냄새 없는 기억은 얕아서 체험을 농축하지 못한다. 후각적 무능은 문명의 역능이 아니라 덜 떨어진 인간의 전형이다. 눈 덮인 편백나무 숲에서 생각한다. 장소마다, 계절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냄새의 지도를 분별할 줄 아는 역량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그윽한 이 냄새, 마음에 영원히 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