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알레친스키
자유를 갈망하는 붓
2021/03 • ISSUE 34
editorKim Jihye
writerShin Iyeon 독립 기획자
20세기 중반부터 유럽 미술계를 선도해온 작가 피에르 알레친스키(Pierre Alechinsky, 1927~). 그는 동양과 서양 문화가 공존하는, 명상적이면서도 서정적인 표현주의 작품을 그리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벨기에 작가다. 대중의 창조적 잠재력을 일깨우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 시작된 그의 작품은 런던의 테이트 모던을 비롯해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파리의 퐁피두, 브뤼셀의 벨기에 왕립미술관 등 전 세계 곳곳에서 꾸준히 선보여왔다.
석판화의 대가
피에르 알레친스키가 작품에서 다루는 매체는 실로 방대하다. 그는 회화뿐 아니라 판화, 벽화, 조각, 삽화, 글, 서예,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해왔다. 그중에서도 석판화는 1963년 이래 50여 년의 세월 동안 알레친스키가 한결같이 탐구해온 매체다. 석판화(리소그래피)는 물과 기름이 분리되는 성질을 이용해 이미지를 찍어내는 기법으로, 판의 요철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때문에 다른 판화 기법에 비해 훨씬 생생하게 드로잉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섬세하고 빠른 붓 터치와 강렬한 색채를 판화 기법으로 완벽하게 재현하고자 했던 알레친스키는 오랜 시간 공들여 석판화 기술을 연마했고, 결국 화학물질(에칭 기술)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오직 물과 기름의 원리로만 이미지를 얻어내는 자신만의 판화 기술을 개발해냈다.
‘Bouche d’egout Ⅰ’(1986)은 알레친스키 석판화의 독창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작품 제목 ‘Bouche d’egout(배수구)’에서 엿볼 수 있듯, 화면 중앙에 배치한 검은색 원형 무늬는 맨홀 뚜껑의 패턴을 본뜬 것이다. 작가는 파리 시내에 실제 존재하는 배수구 표면에 종이를 덮고 그 위에 크레용 왁스나 아크릴물감을 문지르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채집했다. 그리고 이 이미지를 테두리를 메운 즉흥적인 붓 터치와 함께 석판인쇄로 옮겼다.
사실 이 작업은 일련의 시리즈로 제작되었는데, 그보다 1년 앞선 1985년에 뉴욕 거리의 맨홀 뚜껑을 본떠 완성한 ‘Water’를 선보인 적이 있다. 그리고 3년 후인 1988년에는 ‘Seoul’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서울 도심의 맨홀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 역시 화면 중앙에 검붉은빛의 배수구 무늬가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채로운 것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채도 높은 노란색으로 배경을 메웠다는 점이다. 이에 더해 곳곳에 빨간색과 파란색, 흰색의 역동적인 붓 터치를 가미해, 그림 전체가 사물놀이의 정점에 있는 꽹과리를 연상시킨다. 알레친스키가 세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맨홀 뚜껑 같은 사소한 이미지를 수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는 우리 일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평소에는 그 가치를 간과하기 쉬운 존재의 의미를 관객에게 상기시키려 했던 것 같다. 또 이 시기 석판화는 무엇보다 알레친스키의 추상적이면서도 강렬한 붓 터치, 감각적이고 화려한 색감, 그리고 맨홀 뚜껑을 인쇄판으로 활용하는 파격적 시도 등 전례 없는 새로운 시도를 가미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후 그는 명실상부 판화의 예술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가로 인정받았다.
"순수한 원색을 사용해 단순해 보이지만, 자유분방하며 간략하고도 함축적인 형태.
알레친스키는 그것이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궁극적인 자유의 형태라고 말한다."
코브라의 영혼
딱딱하고 기하학적인 추상을 거부하며,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하는 알레친스키의 작품은 종종 서정적 추상화인 ‘앵포르멜informel’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하지만 알레친스키의 이미지에 어느 정도 익숙한 관객이라면, 그의 예술 세계를 하나의 용어로만 정의하기 어렵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앵포르멜뿐 아니라 추상표현주의, 북방의 표현주의 전통과 더불어 초현실주의가 중첩되어 있다. 그리고 그 기원에는 ‘코브라CoBrA 그룹’이 있다. 코브라는 1948년 파리에서 결성된 아방가르드 예술가 그룹으로, 아스게르 요른Asger Jorn, 카럴 아펄Karel Appel 등 창립 작가들의 출신 도시인 북유럽 3국의 수도 코펜하겐Copenhagen, 브뤼셀Brussels, 암스테르담Amsterdam의 머리글자를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당시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불러온 절망에 휩싸여 있었고, 코브라 예술가들은 전쟁 이전에 존재했던 전통적 기준을 모두 부정하는 실험을 감행함으로써 상처를 극복하고자 했다. 원시미술에서 볼 수 있는 대담한 형태와 색채, 질감 등은 코브라 그룹의 주된 화풍으로, 이들이 추구했던 새로운 미와 정신은 예술 사조의 흐름 속에서 현재까지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피에르 알레친스키는 코브라 활동 덕분에 트라우마를 부정하지 않고 기쁨과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1949년 브뤼셀 폭격을 겪은 탓에 정신적으로 피폐한 상태였던 그는 평론가 자크 푸트만Jacques Putman과의 친분으로 코브라의 전시를 보게 되었고, 전쟁의 아픔을 공유하는 그룹원들에게 강한 동질감과 위안을 얻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예술가이던 그는 곧바로 코브라 그룹에 합류했고, 가장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1951년, 자신들이 내건 혁명적 이상을 이룩할 대안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룹은 해체된다. 비록 3년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시 코브라가 구상했던 원시적 이야기, 민속적인 테마, 아동 미술의 이미지는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알레친스키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로 남았다.
기원의 순수에 대한 열망
절친한 평론가 푸트만이 쓴 것처럼, 강렬했던 코브라의 경험은 알레친스키에게 ‘자유에 대한 사유, 그리고 그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라는 과제를 남겼다. 92세의 나이에도 도쿄와 오사카에서 대규모 회고전(2016~2017)을 개최할 만큼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그는 전시 오픈을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에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가위질에 대해 언급한다. 순수한 원색을 사용해 단순해 보이지만, 자유분방하며 간략하고도 함축적인 형태. 알레친스키는 그것이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궁극적인 자유의 형태라고 말한다. 마티스가 말년에 색종이를 잘라 완성한 작품들이 이성적인 문명 너머에서 온, 태초의 자유로운 감각을 전달하는 것처럼, 알레친스키는 자신의 예술 작품도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