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미디어의 영향으로 패션과 음악은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첫 프라다 쇼를 앞두고 사운드트랙을 고민하던 라프 시몬스에게 일렉트릭 뮤직 프로듀서 리치 호틴Richie Hawtin이 한 말이다. 라프 시몬스의 20년 지기이자 미니멀 테크노의 거장으로 불리는 DJ 리치 호틴은 프라다 쇼 음악 작업에 네 번이나 함께했고, ‘프라다 익스텐즈Prada Extends’ 시리즈도 큐레이팅했다. “음악은 패션의 포인트, 아이디어 또는 미학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요소입니다. 비디오나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패션쇼가 대중에게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소개되었고, 그들은 쇼를 통해 디자이너가 전달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더욱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죠.”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의 의상과 애티튜드는 시각을, 그 위로 흐르는 음악은 청각을 자극해 관객들에게 저마다의 여운을 남긴다. 음악이라는 도구가 구현하는 이 패셔너블한 모먼트는 준비 과정에서 비용, 라이선스, 현장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결과 등 많은 고민거리를 안긴다. 때문에 럭셔리 브랜드의 수장들은 컬렉션 쇼를 앞두고 사운드트랙의 기획과 그 외 요소들의 조화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패션을 음악으로 변환해내는 이 작업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도 중요하게 고려한다. 한편 디자이너들이 고심 끝에 선택한 뮤지션 입장에서는 뮤직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증명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디자이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긴밀하게 합을 맞춰 브랜드의 테마를 가장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해내는 센스와 능력을 자동적으로 인증하는 셈이니 말이다.
쇼의 사운드트랙을 만드는 과정에는 뮤직 디렉터의 융통성 있는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지난봄, <보그 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리치 호틴은 작업의 주요 요소로 ‘길고 긴’ 대화를 꼽았다. 그는 프라다 쇼 음악 작업에 앞서 미우치아 프라다, 라프 시몬스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밑그림을 구상한다. “주로 밤늦은 시간, 이메일로 아주 긴 대화를 나눕니다. 직접 눈으로 컬렉션을 보기 전에 고유한 콘셉트와 정신, 아이디어 등에 대해 알게 되죠.” 이렇게 보다 유연한 접근과 사고 그리고 끊임없는 상호작용은 디자이너가 전하려는 콘셉트를 더욱 혁신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작년 11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2022년 F/W 오트 쿠튀르 쇼 ‘발렌티노 더 비기닝Valentino the Beginning’을 클래식하면서도 웅장한 무드로 연출한 발렌티노의 비하인드 신 풍경도 유사하다. 뮤지션 라브린스Labrinth의 음악이 지닌 매력을 경험한 적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에르파올로 피촐리Pierpaolo Piccioli는 이번 컬렉션을 위한 사운드트랙 작업을 그에게 부탁했다. 두 번째 커미션 작업이다. 그리고 뮤지션 라브린스가 디렉팅한 곡 ‘유포리아Euphoria’를 입힌 런웨이는 각종 패션 매체부터 일반 관객까지 다양한 이들의 호평을 자아냈다. 5개월 전 런웨이 영상이 공개된 직후, 유튜브 댓글란에는 이 노래를 쇼에서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굉장히 놀랍고 서정적이다. 모든 노래가 캣워크와 너무 잘 어울린다!” 당연히 이 댓글을 보고 가장 만족스러워했을 이는 라브린스다. 패션 매거진 <i-D>와의 인터뷰에서 라브린스는 작곡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제 음악이 캣워크를 걷는 모델들의 속도와 잘 어우러지기를 바랐어요. 피에르파올로는 이번 사운드트랙이 사랑의 에너지를 지니면서 부드러웠으면 좋겠다고 요청했고요. 많은 패션쇼가 EDM으로 선보이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저 역시 일렉트로니카와 테크노 요소를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시도에 도전하는 것을 선택했죠.” 이 결정은 발렌티노의 헤리티지를 계승하면서도 모던함과 다양성을 구현하는 데도 성공적이었으며, EDM과 테크노 중심으로 흘러가던 쇼 사운드트랙
의 판도를 전환시켰다.
쇼가 끝나도 런웨이 무드와 메시지는 남아 있다. 그래서 브랜드 입장에서는 음악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방식과 그 메시지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작년 11월 비프렌드BFRND는 발렌시아가 2023년 S/S의 사운드트랙 <엘리펀트 ELEPHANT>를 발매했다. 뎀나의 솔 메이트이자 동료, 그리고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비프렌드는 뎀나가 제시한 키워드와 어울릴 만한 장르를 고르면서 작업을 시작했다. 오로지 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지리멸렬한 과정과 싸움에서 영감을 받아 독일 출신 래퍼 UFO361과 프로듀서 SONUS030과 협업해 완성했다. 그들은 관객이 길을 걷다가 문득 느끼는, 세상 그 무엇도 나를 방해할 수 없음을 실감하는 순간에 떠올릴 만한 음악이길 바란다고 전한 바 있다. 컬렉션마다 전위적인 비주얼로 런웨이를 수놓는 발렌시아가, 브랜드의 모든 작업을 이끄는 뎀나와 그의 파트너 비프렌드. 발렌시아가의 룩과 음악으로 강조하는 아이덴티티의 파워는 자신의 개성과 영향력을 SNS로 가감 없이 드러내는 MZ세대의 트렌드와 문화를 관통한다.
2021년 세상을 떠난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질 아블로를 추모하며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인 2023년 S/S 루이 비통 남성복 컬렉션은 다각도로 조명할 만하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안뜰 쿠르 카레Cour Carre´e에서 진행된 쇼에는 세계적인 래퍼 켄드릭 라마가 등장했다. 브랜드 내 최초 흑인 디자이너 및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스트리트 웨어의 감성을 럭셔리 영역으로 끌어올린 버질 아블로에게 헌정하는 순간을 연출한 것. 차분히 마이크를 쥔 채 프런트 로에 앉아 있던 켄드릭 라마는 신곡을 일부 공개했다. ‘카운트 미 아웃Count Me Out’ 후반부에는 가사 대신 버질의 이름만 나직이 외쳤다. 쇼가 끝난 후, 5년 만에 신곡을 발표한 켄드릭 라마의 라이브를 기다린 팬, 루이 비통의 버질 아블로 팀, 그리고 현장 가까이에서 쇼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관객까지 모두가 열광적인 기립 박수를 보냈다.
어떤 브랜드든 런웨이의 사운드트랙 리스트를 듣고 나면, 화려한 트렌드 이면의 또 다른 비하인드 신과도 같은 메시지가 남는다. 패션과 음악의 테두리 안에서 신뢰와 존중으로 쌓은 교감이야말로 창조적인 작업의 가장 주요한 원동력이라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