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 • ISSUE 36
writer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editorKim Jihye
"쉼 없는 대화를 멈출 때 비로소 들리는 것들이 있다.
그 소리는 자기 안에서 온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진정한 기쁨은 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공소는 별다른 장식 없이 의자만 줄지어 놓인 작은 예배당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둑한 공간에, 천장에서 떨어지는 한 줄기 강한 빛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맨 뒤쪽 의자에 앉아 가만히 십자가 쪽을 바라본다. 소박한 예배당은 오직 어둠과 빛만으로 장식된 것처럼 보인다. 흑백의 강한 대비가 시선을 무한정 끌어들이고 생각을 집중시킨다. 비어서 오히려 가득하다. 승효상은 이곳을 가리켜 “가장 본질적인 것만 남겨둠으로써 자신을 성찰하고 신과 대화할수 있게 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비어 있어야 생각할 수 있다. 요란한 장식은 머릿속을 소란하게 만들고, 넘치는 자극은 영혼을 어지럽힌다. 그 무렵 나는 너무나 피로했다. 마음의 전등이 수시로 켜지고, 욕망이 멈추지 않아 한시도 쉴 수 없었다. 바라던 지위를 얻어도 소용없고, 원하는 음식을 앞에 두어도 입맛이 없고, 아름다운 경치를 봐도 시큰둥했다. 어느 날 밤에 혼자 있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다. ‘이것이 정녕 삶이란 말인가.’ 필요한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성이었다. 방해받지 않고 깊이 지나온 길을 생각하고, 영적 고양이 찾아오는 순간을 갈구하는 체험이 필요했다.
세계는 너무 산만하다
그린필드는 ‘정보피로증후군’을 경고한다. 정보피로증후군은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를 처리하느라 뇌가 늘 지친 상태를 말한다. 우리 뇌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으므로, 처리하지 못한 정보를 너무 많이 담고 있으면 작업 기억 용량이 부족해지면서 정보처리 속도가 느려지고, 새로운 기억도 형성하지 못한다. 받아들인 정보는 모두 처리되어 기억되거나 삭제되어 망각되어야 한다. 정보를 모두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우리 영혼은 점차 죄책감과 무기력으로 물들고 우리 정신은 조급증과 불안증에 사로잡히며, 우리 뇌는 강박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소진되어버린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아프거나 몸이 병들게 된다. 아마도 나는 돌마루공소에 갈 무렵, 이와 비슷한 상태였던 듯하다.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 많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잘 쉬는 기술〉에서 영국 작가 클라우디아 해먼드는 인간이 정말 잘 살고 있는지 측정하는 척도로 휴식을 꼽았다. 전 세계 1백35개국에서 1만8천 명이 참여한 광범위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활동 중 대다수는 ‘혼자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산책하고, 목욕하고, 빈둥대고, 몽상하고, 명상할 때 휴식한다고 느꼈다. 바꾸어 말하면, 홀로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 많을수록 인간은 잘 살고 있는 셈이다.
교토의 은각사에서는 누구나 마음이 가만해진다. 인간의 손길을 불어넣지 않고 비바람의 힘만으로 장식한 목조건물, 굵은 모래흙을 정갈히 쌓아 올린 탑, 따로 풀과 나무로 단장하지 않고 갈퀴로 훑어 꾸민 질박한 정원, 수백 년을 이어와 신비한 영성까지 느껴지는 색깔 짙은 삼나무 숲…. 꾸밈을 버림으로써 사소한 것조차 아름답게 만드는 탈속의 미학인 ‘와비’와 텅 비움으로써 한없는 넓이와 깊이를 거기 있도록 만드는 한적의 미학인 ‘사비’가 그 안에 담겨 있다. 한 시인은 이를 일컬어 “깊이 파고드는 고요함”이라고 했다. 정보과잉증후군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는 내적 정적으로 영혼을 휴식하게 만드는 이러한 종류의 고요가 필요하다.
‘늘 접속된 상태’는 우리 내면을 파괴한다. 정보 쓰레기와공진화하면, 우리 마음 역시 자연스레 쓰레기로 변한다. 그 안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보람도, 기쁨도, 평화도 얻지 못한다. 따라서 행복해지려면 정보에 수시로 반응하면서 수다를 떠는 대신 차라리 침묵해야 한다. 쉼 없는 대화를 멈출 때 비로소 들리는 것들이 있다. 그 소리는 자기 안에서 온다. 고대 그리스인은 진정한 기쁨은 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하늘에서 신이 인간을 내려다보듯, 주어진 정보에 즉각 반응하거나 익숙한 정보를 반복하기보다 한 걸음 떨어져 그 과정과 결과를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숙고하며, 가치를 찬찬히 따져보는 힘, 즉 관조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성찰할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 자신과 세계 사이에는 문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바깥이 소란해도 나는 조용할 수 있고, 세상이 틀려도 나는 올바를 수 있으며, 집단이 타락해도 나는 정의로울 수 있다. 세상일에 눈과 귀를 열어두되, 내면의 단련된 힘을 믿고 세상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이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영혼을 뜻하는 영어 스피릿spirit은 히브리어 루아흐ruach에서 파생된 말로 본래 숨결, 바람을 뜻한다. 성서에서 큰 영혼인 성령(聖靈, spirit)은 흔히 공기의 움직임, 즉 바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영혼 역시 바람을 닮았다. 영혼을 돌본다는 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바람의 움직임을 잘 살피는 일이다. 우리 자아는 짐승의 욕구와 신적 영혼 사이에 있다. 현대사회는 우리 자아가 욕구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문제는 욕구가 만족할 줄 모른다는 점이다. 바라는 ‘신상’을 얻자마자 며칠도 안 되어 싫증 나서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마음을 생각해보라. 욕구는 우리 몸과 마음을 영원한 불만족 상태로 몰아붙인다. 그런데 불만에 가득한 삶이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공자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몸을 깨끗이 하고, 음식을 가려 먹으며, 평소와는 다른 장소에 거하면서 몸과 마음을 준비했다. 목욕은 육체를 정화하는 일이고, 음식을 가려 먹는 것은 감각을 혁신하는 일이며, 거처를 바꾸는 것은 마음을 속된 것에서 멀리하는 일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홀로 겟세마네 언덕에 올라 묵상하면서 신의 뜻을 물었고, 붓다는 생로병사의 번뇌를 떨치기 위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일곱 해 동안 명상을 거듭했다. 명상을 통해 이들은 내면에 있는 신과 만날 수 있었고, 드디어 인간과 신을 잇는 성인聖人이 되었다. 세상과 접속을 멈추고 떠도는 마음을 접어서, 지금 당장 영혼의 숨결을 확인하라. 누구나 행복은 바깥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있나니.
"명상은 세상의 잡된 신호를 끊음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신을 깨우는 방법이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마음이 생명의 숨결을 좇아 움직이도록 하는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