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그리고 김창열
2021/05 • ISSUE 36
editorKim Jihye
writerKim Jaeseok 갤러리현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2021년 1월 5일, 김창열 화백이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물방울 화가’라는 수식은 그의 또 다른 이름과 같다. 작가는 1970년대 초반부터 캔버스에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다. 왜 물방울이었을까? 그에게 물방울은 무엇이었을까? 생전에 김창열 화백은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로 용해하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虛’로 돌릴 때 우리는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가의 말에서 일제강점기, 남북 분단, 한국전쟁, 산업화, 이민자 생활 등 격변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친 한 인간의 인생사를 엿볼 수 있다.
김창열의 고향은 평안남도 맹산이다. 대동강 상류의 작은 강촌으로, 그에겐 마을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맑고 투명한 강물이 고향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명필가였던 조부에게 천자문과 서예를 배우며 성장한 작가는 훗날 물(방울)과 천자문에 대한 원초적 심상을 철학적이고 명상적인 ‘회귀’ 연작에 녹여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가족에게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한 그는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화가의 꿈을 놓치지 않았다. 해방 후 이념 갈등 시기에 서울로 내려왔지만, 근 1년 동안 피란민 수용소에서 지냈다. 지독한 배고픔 속에서도 문학과 미술 서적을 탐독한 시절이었다. 서양화가 이쾌대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그림을 배운 그는 검정고시로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가족과도 헤어졌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 되기까지
전쟁 이후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주역이 된다. 또래 작가들과 함께 1957년 ‘한국현대미술가협회(현대미협)’를 창립해 전시를 열며 기존 화단의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1950년대 김창열은 당대 전위미술을 대표하는 앵포르멜 계열의 작품을 발표했다. 캔버스에 두껍게 바른 물감의 거친 질감, 붓을 휘두른 작가의 몸짓과 그 흔적을 강조했다. 그는 앵포르멜 계열의 추상 연작 ‘상흔’과 ‘제사’ 등을 제작하며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를 씻어냈다. 또 다른 현대미술 운동 조직인 ‘악뛰엘’에서도 창립 멤버이자 그룹의 주축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60년대 김창열은 해외로 눈길을 돌렸다.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하며 국제 무대에 처음 진출한 그는 1965년 런던에서 개최한 국제예술가협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벗어났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이민자로서 그의 삶이 시작됐다. 1965년부터 4년간 미국 뉴욕에서 록펠러재단의 장학금으로 아츠 스튜던트 리그Arts Student League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 당대 미국 화단의 주류 흐름에서 영감을 받은 기계적이고 추상적인 형태가 리드미컬하게 배열된 ‘구성’ 연작을 그리며 앵포르멜 시기 이후의 변화를 모색했다. 백남준의 도움으로 1969년 제7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한 그는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파리로 돌아갔다.
1970년대 김창열은 비로소 ‘물방울’의 세계로 진입했다. 그는 파리에서 약 15km 떨어진 팔레조의 낡은 마구간에 아틀리에와 숙소를 마련했다. 이곳에서 후에 아내가 된 마르틴 질롱Martine Jillon 여사를 만났다. 물방울 회화 탄생에 얽힌 이야기는 많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사연은 이렇다.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 작가는 캔버스를 재활용하기 위해 뒷면에 물을 뿌려 물감이 쉽게 떨어지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화폭에 맺혀 아침 햇살을 받은 물방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작품의 주요 모티프로 삼았다는 것. 프랑스에서 먼저 이름을 알린 그는 1976년 개인전을 통해 한국에 처음 물방울 회화를 선보였고, 미술계 안팎으로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나에게 그림이란 무언가 다른 것, 손으로 만든 타인을 감동시키는 어떤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하지만 그 역시 하나의 정신적 놀이이며 명상 혹은 기도와 같은 행위이다."
물방울, 작품이 되다
ARTIST PROFILE
김창열 Kim Tschang-Yeul
김창열(1929-2021)은 캔버스에 맑게 빛나는 물방울과 천자문을 섬세하게 그리고 쓰며, 회화의 본질을 독창적으로 사유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했으며, 퐁피두센터, 도쿄국립미술관, 보스턴현대미술관, 보훔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리움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