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처음부터 물에, 특히 바다에 생명의 근원이 있다고 믿어왔다. 인류 최초의 문학인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바다에 생명의 비밀이 있음을 알려주는 장면이 있다. “길가메시여, 나는 숨겨진 일을 말할 것이오. / 신들의 비밀을 그대에게 전할 것이오. / 식물은 사슴뿔처럼 생겼소. / 그 뿔은 장미꽃처럼 그대 손을 찌를 것이오. / 그대의 손이 그 식물을 취하면, / 그대는 새 삶을 얻을 것이오.” 태초의 대홍수 때 신들의 심판을 모면함으로써 영원한 삶을 얻은 우트나피쉬팀은 길가메시에게 불로불사의 비결을 알려준다.
사슴뿔처럼 생긴 식물은 인간의 늙은 몸을 다시 젊게 하는 역사상 첫 번째 안티에이징 물질이다. 그런데 이 불로초는 바닷속에 있다. 길가메시는 물속 깊이 헤엄쳐 들어가는 모험 끝에, 가시에 찔려 손바닥이 피로 물드는 고통을 견디면서 인간에게 새로운 삶을 주는 이 신비한 식물을 건져 올린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자신이 먹어버리는 대신 길가메시는 고향 우루크로 가져가 만인과 나누고 싶어 한다. 가장 좋은 것을 독차지하지 않고 만인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 이것이 영웅의 조건이며, 길가메시가 후대에 서사시의 주인공으로 남은 이유다.
바다에는 생명의 근원이 있고, 인간은 헤엄을 쳐서 그 근원에 가 닿는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헤엄은 참 독특한 활동이다. 걷거나 달리려면 오랜 연습이 필요하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 벌써 헤엄칠 수 있다. 수중 분만하는 장면을 보면 갓 태어난 아기는 어머니 자궁 속에 있던 버릇대로 팔다리를 휘저으면서 자연스레 물을 헨다. 땅 위에 살면서 아기는 불행히도 몇 달 만에 수영 능력을 상실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아주 짧은 연습만으로 다시 물에 뜰 수 있다. 우리 안에는 이미 헤엄 유전자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물고기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살아간다. 그러고 보면 물은 인간을 본래 형상인 물고기로 되돌린다. 영혼의 메마른 피부를 보습함으로써 망가진 인간을 고친다. 고장 난 마음을 치유하고, 상처받은 영혼을 거듭나게 한다. 기독교의 세례는 본래 물을 몇 방울 머리에 뿌리는 행사가 아니라 물속에 온몸을 던져 넣어 인간 전체를 정화함으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의례였다. 의례 형태가 어떻든지 간에 길가메시가 온몸을 던져 생명의 뿌리에 닿았듯, 영혼의 헤엄은 전면적일수록 좋다. 다시 말하지만, 여름휴가는 단지 더위를 피하는 일이 아니라 ‘이대로는 더 이상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어떻게든 물에서 생명을 돌려받으려는 안간힘이다.
헤엄은 활력 넘치는 운동이 아니라 느긋이 누리는 향락이다. 제러미 벤담의 말처럼, 수영에는 “적당한 신체 노동으로 느낄 수 있는 건강의 즐거움”이 물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수영하려고 바다로 휴가를 떠나지는 않는다. 바다에서 헤엄치는 기쁨은 온몸의 힘을 빼고 물에 가만히 떠 있을 때 더 크게 찾아온다. 우리 내부의 물과 자연의 물이 서서히 리듬을 맞추면서 공명하는 순간, 출렁이는 물의 리듬에 맞춰 심장이 박동하고 혈액이 순환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국의 시인 톰 린슨은 “헤엄치는 것은 물의 의미를 붙잡는 것”이라고 말한다. 헤엄은 “고동치는 흐름을 감촉하는 일”이고, “물의 포옹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세계의 뿌리 리듬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몸 전체를 물의 운동에 내맡기는 일이다. 물의 “움켜잡음을 허용”하면서 물의 힘을 움켜잡을 때 우리는 드디어 헤엄친다. ‘움켜잡는 것(grasp)’은 곧 ‘이해하는 것’이다. 억지로 움직이지 않고 나를 물의 손에 내맡길 때 우리와 물은 서로의 의미를 이해한다.
우리가 우리보다 더 큰 것 안에 온전히 속해 있음을 누리는 일이 안식이다. 운동으로서 수영은 물의 저항력을 이용해 몸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일이지만, 향락으로서 헤엄은 물의 뿌리 생명과 우리가 하나되는 일이다. 사람들은 물살을 가르면서 물의 저항을 이겨내는 운동도 좋아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또한 부력에 몸을 맡기고 바다 위를 둥둥 헤엄치는 평안을 사랑한다. 오래전 저 길가메시처럼 바다를 헤쳐 뿌리 생명과 접촉하기 위해, 그 힘으로 누수된 영혼을 보충하고 갈라진 틈을 메우기 위해 저 많은 사람이 오늘도 바닷물 위에서 망연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