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ARING SENSUALITY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 다시 한 번 뒤돌아보게 만드는 유혹적인 매력을 지닌 가을 향에 대하여.
2021/11 • ISSUE 41
writerKim Taehyung 조향사, 〈나는 네NEZ입니다〉 저자
1. KILIAN • 펄 우드 • 50ml, 43만5천원대
2. LELABO • 상탈 33 오 드 퍼퓸 • 100ml, 36만7천원
3. D.S.&DURGA • 앰버 튜토닉 • 100ml, 32만9천원
4. CREED • 러브 인 블랙 오 드 퍼퓸 • 75ml, 36만8천원
5. MEMObyLAPERVA • 이탈리안 레더 오 드 퍼퓸 • 75ml, 31만원
6. MAISONFRANCISKURKDJIANPARIS • 그랑 수와 • 70ml, 23만9천원
7. EXNIHILO • 브아 디베 오 드 퍼퓸 • 100ml, 40만원
"감정은 감각으로부터 비롯된다.
사랑, 그리움, 슬픔. 모든 감정은
빛과 소리 그리고 향을 토대로 빚어낸
감각의 결과물이다."
가을이다. 매년 이맘때 달라지는 것은 온도계를 채우고 있는 수은주의 높이뿐만이 아니다. 거리를 거닐다 보면 귓가에 들리는 노랫말이 불과 며칠 사이에 서정적으로 변해버린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또 사람들의 옷차림이 색과 질감을 달리해가는 것처럼 그 곁에 스며드는 향수 계열도 한층 따뜻해진다. 무엇이 이토록 우리를 변화하게 만드는 것일까. 가을은 폭발적인 활기와 생명력으로 가득했던 여름을 보내며 세상이 쥐고 있던 것들을 하나둘 내려놓는 계절이다. 가지각색의 향기를 자랑하던 꽃은 모습을 감추고, 무성했던 초록 이파리는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낯설어진 바람의 온도에 스쳐간 인연을 떠올리고, 발에 닿는 낙엽을 보며 지나온 과거를 회상한다. 누군가는 이 모든 것을 그저 자연적인 흐름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가을 속의 인간은 항상 같은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서 있는 나무들과는 분명 다르지 않은가. 인간은 공허함을 느낀다. 그렇기에 가을이 되면 끊임없이 비어가는 내면을 감정으로 메우려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계절을 맞이할 때마다 인간의 감각이 참으로 소중하다고 느낀다. 감정이라는 것은 실로 감각으로부터 비롯된다. 사랑이라든지, 그리움이라든지 하는 모든 감정은 우리가 지금껏 쌓아온 빛과 소리 그리고 향을 토대로 빚어낸 감각의 결과물이다. 결국 감각이 없으면 가을도 없는 셈이다. 나에게는 향이 없었으면 이 계절도 무의미했을 것이다.
가을을 일깨우는 향기가 있다. 봄을 알리는 싱그러운 라일락의 플로럴 노트나 과즙의 청량감이 흘러넘치는 시트러스 노트를 뒤로하고, 이제는 따뜻함을 전하는 향기에 코끝이 향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향 노트는 샌달우드Sandalwood다. 대중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우디 계열이 매번 따뜻하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드라이한 시더우드Cedarwood나 촉촉한 흙내음을 품은 베티버Vetiver는 주로 아로마틱 노트와 함께 상쾌함을 전하는 남성 향수들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샌달우드 향기는 언제나 부드럽고 우아하게 피어나기 마련이다. 눈을 감고 이 짙은 적갈색 나무를 더듬어보면 크리미한 코코넛의 향기는 물론이고 로즈 노트와 이어질 듯이 옅은 플로럴함마저도 느껴진다. 샌달우드 노트가 돋보이는 향수로는 르라보Le Labo의 상탈Santal 33이나 딥티크Diptyque의 탐 다오Tam Dao 등 익숙한 작품이 여럿 떠오르겠지만, 조금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세르주 루텐Serge Lutens의 상탈 마제스퀼Santal Majuscule도 참신한 선택지가 될 것이다. 시나몬이 두드러지는 웜 스파이시Warmspicy 노트가 향의 색채를 강조하고 쌉싸름한 카카오의 바닐라 노트가 고혹한 매력을 더하는 향수로, 한껏 깊어진 샌달우드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소개할 가을의 향기는 머스크다. 몇 년 전 한창 에트르라에 몰두해 작업하던 시기도 지금 이 무렵이었다. 동료들과 샘플을 여러 번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가을이 찾아왔다. 우리가 작업하던 향의 주제는 ‘지나간 나의 연인’이었다. 지금이야 며칠 전 꿈속에 등장한 인물의 얼굴처럼 희미해졌지만, 당시의 나는 그녀가 담긴 기억의 파편을 아직 간직하고 있던 터였다. 끝내 내가 선택한 향 노트는 머스크였다. 머스크는 참으로 흥미로운 향기를 지녔다. 대부분의 향 노트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그들에게 가려지는 듯 보이지만, 결국 향 전반에 걸쳐 자신만의 온도와 질감을 남기기 때문이다. 머스크 향기는 불투명한 커튼에 가려 그 너머가 손에 잡히지 않을 것만 같으며, 둥글고 폭신한 무언가가 내 품 안으로 포근히 밀려 들어오는 느낌을 전해준다. 그녀의 살 내음에 파묻힐 순간만을 고대하며 장미 꽃다발을 준비하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연을 다했지만 사무치도록 따뜻한 순간을 함께했던 그녀를 다시 그려내야 했기에 우리는 향의 밸런스가 뒤틀릴 정도로 머스크에 집착했다. 43 벨뷰Bellevue가 완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녀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공허를 머스크 향기가 채워준 덕분일지도 모른다.
다시 가을이다. 우리의 마음속이 비어감을 감내해야 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아니, 그 자리를 향기로 다시 메울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이가을, 당신은 어떤 향기와 함께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