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귀히 여기면 꽃에 입문한 것이고, 직접 마당에 길러서 피고 지는 모든 과정을 살피면 꽃과 사귀는 것이며 기념할 언어를 얻어 마음에 꽃을 피울 수 있으면 비로소 꽃을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좋을 때는 동백 숲의 쓸쓸한 해 질 녘 눈 속에서 불꽃처럼 붉게 막 꽃이 필 무렵이어라."
동백, 차가울수록 사무치는 사랑의 불꽃
봄은 인간을 나그네로 만든다. 바빠도 활짝 핀 꽃의 아름다움과 짙은 향기의 유혹을 이길 수 없어 이름난 장소를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선다. 한 해 꽃구경의 시작은 언제나 여수 오동도. 공기는 차고 바람이 매서우며 그늘에는 얼음도 채 녹지 않은 늦겨울에 동백은 온 섬을 붉게 물들인다. 꽃은 항상 아름답다. 봉오리 지어 갓 피어날 때도, 활짝 피었을 때도, 지고 난 후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도 나름대로 아름답다. 그러나 시인들은 언어의 힘을 빌려 꽃을 더 아름답게 즐기는 법을 알려준다. 꽃의 힘이 언어를 끌어서 시를 낳고, 시의 힘이 꽃을 더욱 꽃답게 만드는 거룩한 순환이다. 꽃은 시와 함께일 때 비로소 귀한 가치를 지닌다.
“백설이 눈부신/ 하늘 한 모서리/ 다홍으로/ 불이 붙는다.”(정훈, <동백>) 붉은 동백꽃은 흰 눈과 어울릴 때 가장 아름답다. 눈 시릴 듯 새하얀 설경과 불꽃처럼 타오르는 동백이 어우러져 강렬한 대비를 이룬 풍경은 심장을 뛰게 한다. “차가울수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시인의 눈에 동백은 연모하는 임을 향해 토해내는 뜨거운 사랑의 증거다. 연인과 함께 섬을 거닐다 보면, 과연 붙잡은 손은 절로 뜨거워지고 가슴엔 사랑의 빨간 등불이 하나둘 켜지는 걸 느낄 수 있다. 동백이 절정으로 아름다울 때는 황혼이다. “가장 좋을 때는 동백 숲의 쓸쓸한 해 질 녘/ 눈 속에서 불꽃처럼 붉게 막 꽃이 필 무렵이어라.”(이시헌, <동백>) 눈 속의 동백을 본 적은 아직 한 차례도 없다. 그러나 노을 속 동백은 자주 만났다.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붉음을 다투듯 동백과 노을이 선연히 피어난 모습은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될 것이다.
차마 봄이란 말을 할 수 없어서
동백꽃에 이어 ‘강원도 동백’인 생강꽃과 섬진강 매화가 세상을 물들인 다음 응봉산 개나리, 천주산 진달래, 서산 수선화, 제주 유채가 차례로 핀다. “매화꽃 졌다 하신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란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은 차마 쓰기 어려워서.”(이은상, <개나리>) 꽃은 사랑의 바람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랑은 신비롭고 신성한 현상이라서 함부로 입에 담으면 사라질까 두렵다. 청춘의 두 연인은 사랑한다는 말을 차마 전하지 못하고 애꿎게 꽃 이야기만 주고받는데, 애끓는 사랑이다. 활짝 핀 꽃은 마음의 봄을 자극하는데 꽃 얘기로만 마음을 주고받으니 사랑은 갈수록 간절해진다. 응봉산 개나리는 서울숲 쪽에서 바라볼 때 가장 눈부시다. 중랑천 건너로 매처럼 생긴 바위 절벽이 솟아 있고, 벼랑 가득 모두 개나리꽃이 피어 눈부신 봄을 알린다.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이다. 두 사람, 진달래가 울긋불긋 만발한 산이나 수선화가 향기롭게 피어난 들에서는 함께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다.
고향의 봄, 연분홍 진달래와 연푸른 수양버들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기면 자칫 혼마저 잃을 수 있다. 벚꽃놀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들여온 유행으로 벚꽃은 비화飛花, 날아다니는 꽃이다. 멀리서 보면 연분홍 안개를 뿌린 듯하고, 다가서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꿈결 같은 풍경을 열어 보인다. 구경 갔다 오면 옷 속 어딘가엔 작은 꽃잎이 달라붙어 있다. 사쿠라, 즉 벚꽃의 화려함이 그대로 봄을 뜻하는 의미가 되지 않도록 이은상 시인은 진달래를 ‘고향의 꽃’으로 삼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이은상, <고향의 봄>) 복숭아꽃과 살구꽃은 우리 민족이 예부터 즐겨온 봄나들이 꽃이다. 봄볕 받아 파릇파릇 연녹색 잎을 여는 ‘냇가의 수양버들’도 함께 우리 봄을 상징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의 <경도잡지>는 봄나들이 풍경을 묘사한다. “술과 시와 노래를 즐기는 이라면 필운대의 살구꽃, 북둔의 복사꽃, 흥인문 밖의 버들을 즐겨 찾는다. 한양 도성의 둘레는 40리인데 하루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성 안팎의 꽃과 버들을 두루 감상하는 것을 최고로 친다.” 봄이 한창일 무렵 서울을 하루 만에 돌면서 화사한 봄꽃과 연둣빛 버들을 감상하는 문화가 있었다. 배화여대의 살구꽃, 성북동의 복숭아꽃, 청계천의 버들 등이 우리 봄을 압축했다. 진달래는 산등성이 가득 비단처럼 깔린다.
"붉은 앵두꽃은 향기 나는 눈처럼 나부끼고 흰 자두꽃은 은빛 바다처럼 물결치네."
이응희 시인은 비 내린 직후의 진달래꽃이 특히 아름답다고 말한다. 봄날 황사가 말갛게 씻긴 뒤 자줏빛 꽃잎이 천지를 뒤덮은 풍광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호로병 속 봄비가 흡족하니/ 곳곳마다 두견새 우는 소리/ 일만 골짜기가 붉은 비단을 두르고/ 일천 바위엔 자줏빛 꽃잎이 빛난다./ 머리에 꽂으니 그 빛이 사랑스럽고/ 솥에 전을 부치니 부드러워 좋구나.”(이응희, <두견>)
산과 들에 진달래꽃이 피면 사람들은 파릇파릇 풀이 돋는 들판으로 답청踏靑을 나갔다. 밟을 답踏, 푸를 청靑, 풀을 밟는다는 뜻이다. 겨우내 방구석에 붙잡혀서 웅크린 몸을 활짝 열어 자연의 신선한 생기를 듬뿍듬뿍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여성들은 오랜만에 집 안에서 놓여나 산야로 나가서 머리에 꽃을 꽂은 채 꽃잎을 씻어 화전을 부쳐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일촌간장 쌓인 근심, 도화 유수로 씻어볼까?/ 천만 첩이나 쌓인 설움, 웃음 끝에 하나 없네.”(<덴동어미 화전가>) 여기에서 도화桃花는 복숭아꽃, 유수流水는 흐르는 물이다. 화전놀이는 복숭아꽃 만발하고 맑은 시냇물 흐르는 곳에서 마음껏 수다 떨면서 그간 쌓인 울화를 풀고, 우애를 확인하는 해방의 축제였다. 남성들도 친구와 약속을 잡아놓고 비가 오든 안개가 있든 상관없이 무작정 꽃구경에 나섰다. “비 오면 꽃을 씻기며 놀고, 안개 끼면 꽃을 적시며 놀고, 바람 불면 꽃을 지키며 논다.”(권상신, <남산 봄놀이를 약속하다>) 봄꽃이 좋은 곳을 찾아 자리를 깔고 둘러앉아 음식과 술을 즐기면서 시를 읊어 천금 같은 봄밤을 노래했다. “봄밤의 일각은 천금에 값한다네./ 꽃향기는 맑고 달빛은 은은하네.”(소동파, <봄밤>)
밤의 꽃도 낮 못지않게 좋다. 희미한 달빛 아래 꽃의 자태는 속되지 않고 우아하다. 보이지 않기에 향기는 더 짙어지고, 시끄럽지 않기에 꽃의 언어도 더 섬세히 들린다. 은은한 달빛 아래 희고 붉은 꽃은 마음을 빨아들인다. 이 꽃 앞에서 넋을 잃고 저 나무 밑에서 달에 빠지는 밤을 모른다면, 봄날의 미美도 절반만 아는 셈이다.
차라리 한 해 수명이 짧아질지언정
천한 자는 ‘신’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나지 않고도 가능한 사랑은 고귀하지 않은가. 나는 아직 수준이 얕아 혹여 시기를 놓칠세라 활짝 핀 꽃을 쫓아 봄날 내내 방방곡곡을 헤매는 수준이다. 이는 꽃 사랑의 가장 낮은 단계에 불과하다. 중국 청나라 때 문인 이어李漁는 “꽃구경과 새소리 듣기를 좋아해 밤에는 꽃보다 늦게 잠들고 아침에는 새보다 빨리 일어나 소리 하나, 그 모습 하나라도 놓칠까 두려워했다.” 어느 해엔 수선화 살 돈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아내가 타박하자 이어는 말했다. “차라리 한 해 수명이 짧아질지언정 일세지화를 빼놓을 수 없소.” 제철 꽃 감상에 목숨을 걸어야 치痴나 광狂, 즉 꽃에 미친 사람이 된다. 꽃에 미친 단계를 지나 꽃이 진 후에도 사랑을 멈추지 않는 이들도 있다. 사랑을 뜻하는 한자 애愛는 본래 뒤돌아보는 사람의 모습에 마음(心)을 그려 넣은 것이다. 헤어진 사람이나 사물에 마음이 쓰여 견딜 수 없는 상태, 그것이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헤어진 다음에 비로소 시작된다. 마음 깊이 꽃을 음미한 순간과 이를 응축한 언어가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꽃은 시를 불러 언어의 열매를 맺고, 시는 꽃을 영원히 아름답게 만든다. 꽃구경에는 반드시 시가 있어야 한다. 봄은 진달래꽃 다음에 자두꽃, 벚꽃, 복사꽃, 앵두꽃 등을 차례로 내보내 아름다움을 다투게 한다. “붉은 앵두꽃은 향기 나는 눈처럼 나부끼고/ 흰 자두꽃은 은빛 바다처럼 물결치네.”(이황, <봄을 느껴서>) 이황이 만났던 꽃의 파도는 수백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 눈앞에서 넘실댄다. 꽃의 언어를 한 줄로 압축하는 힘이 있다면 우리는 이 봄을 몇 곱절 아름답게 즐길 수 있다.
writer Jang Eunsu 출판 편집인, 문학평론가
editor Lim Ji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