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색화와 단색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노장의 열정
현대미술의 거장. 이보다 더 게르하르트 리히터에게 걸맞은 수식어를 찾을 수 있을까?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을 감상해본 경험이 있더라도 리히터의 작품 스타일은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에 다른 공간에서 그의 작품을 만난다면 쉽사리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확신한다. 대부분의 저명한 미술가는 독보적 양식이나 단일한 레퍼토리가 존재하는데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오히려 한 가지 작품 스타일로 고착화되는 것을 피하고 오늘날 회화의 역할과 가능성에 대해 부단히 연구했다. 또 예술에 대한 성실한 태도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공식 홈페이지에 소개된 많은 작업량을 봐도 알 수 있는 대목. 그의 그림은 크게 사진 회화와 추상회화로 나눌 수 있는데, 추상회화에서도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는 컬러 차트 시리즈부터 회색으로만 그린 그림, 오직 빨강·파랑·노랑만 사용한 그림 등으로 세분화된다. 그 밖에 사진이나 유리 위에 그린 그림과 설치 및 조각 작품도 있다. 지난해 서울의 에스파스 루이 비통에서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4900가지 색채’(2007)라는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를 열었다. 당시 이 전시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제작한 쾰른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에 대한 영상도 볼 수 있었다. 회화 작업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컬러의 정사각형들이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무너진 성당의 남쪽 스테인드글라스 복원 작업으로 채워진 것. 이 컬러 차트는 일찍이 1960년대 산업용 페인트 견본에서 착안한 작업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의 강박적 면모를 잘 드러낸다.
최근 디지털에 기반한 화려한 볼거리가 넘쳐나는 가운데 가장 전통적인 미술 장르라 할 수 있는 ‘회화’의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이미 오래전 사진이 발명되면서 시작됐는데, 1966년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내가 보기에 많은 아마추어 사진이 세잔의 최고작보다 낫다”고 말했다. 이즈음 독일에서는 요제프 보이스를 필두로 한 플럭서스 운동, 미국에서는 앤디 워홀을 위시한 팝아트가 현대미술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1963년 10월 11일 뒤셀도르프의 한 가구 상점에서 동료 작가 콘라트 피셔-루에크와 함께 ‘팝과 더불어 살기-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을 위한 시연’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 작업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지그마어 폴케, 만프레트 쿠트너와 베를린의 르네 블록 갤러리에서 <네오다다 팝 데콜라주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이 전시는 독일 계열의 팝아트 회화가 다시 모이게 된 계기로, 이들이 전면에 내세운 ‘자본주의적 리얼리즘’이라는 말은 상업주의에 대해 비판적 면모를 띤다. 이와 동시에 리히터가 어린 시절 동독에서 강요받았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대한 반감도 컸음을 알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