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T of LIVING
멈추지 않는 노매드 라이프
주얼리, 공간, 세라믹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덴마크 태생의 아티스트 말레네 비르거Malene Birger. 그녀는 20년 가까이 일군 자신의 패션 브랜드 데이 비거 엣 미켈센Day Birger et Mikkelsen과 바이 말렌 비거By Malene Birger를 매각하기로 결정했을 때 아쉬운 감정보단 가뿐한 마음이 앞섰다. 본래 패션을 베이스로 활동하던 그녀는 자신의 디자인 영역을 확장하며 인테리어와 예술에 관심을 두었다. “저는 매일 성장하고 발전해요. 새로운 걸 배우거나 생소한 장르의 문을 여는 것을 좋아하죠. 궁금한 것이 많은 편이에요.” 호기심이 많다는 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으며, 그 이면에 더 굳건한 삶의 목표와 철학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대한 호기심과 자유로운 영혼 덕분에 지난 40년간 무려 35번의 이사를 감행한 말레네 비르거는 영국, 스페인, 그리스의 외딴섬부터 동남아시아까지 다양한 곳에서 거주했다. 이사가 번거롭지 않으냐는 물음에 그녀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사하는 이유는 없어요. 단지 영감이 이끄는 곳으로 몸을 옮기고, 생경하던 공간을 제 집으로 만드는 것을 즐겨요.”
스스로 노매드라 정의하며 여행하고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집이 있기에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것 같아요.” 평균적으로 2년마다 거주지를 옮기지만 현재는 이탈리아가 고향이라고 말한다. “11년 전 코모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오래된 저택을 발견했어요.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던 런던에서 왔던 터라 코모 호수는 파라다이스 같았죠.” 그리하여 짐을 푼 곳은 예술적 취향과 자연에 대한 애착이 온전히 묻어나는 지금의 빌라다.
영원히 정착하고 싶은 고요한 유혹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한 롬바르디아주에는 독특한 형태의 호수가 유독 많다. 그중 코모 호수(Lake Como)는 이탈리아인이 특히 사랑하는 호수다. 알파벳 Y를 거꾸로 세운 듯 사람 인人 자와 비슷한 형태를 띠는데, 이러한 모양에 걸맞게 마치 운명처럼 유명 인사들이 거주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알레산드로 만초니 같은 대문호부터 루치아노 파바로티, 도나텔라 베르사체, 조지 클루니, 마돈나에 이르기까지. 그들 역시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코모 호숫가에서 휴양을 즐기며 창작의 영감을 얻는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게 일렁이는 물결, 새벽의 물안개와 알프스의 만년설을 즐길 수 있는 코모는 이탈리아와 지중해식 라이프스타일을 선호하던 자유분방한 말레네 비르거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무렵 남편과 사흘 동안 코모 호숫가에 머물며 이 저택에 겨우 두 번 방문한 것이 전부였지만 놓치면 안 된다는 확신과 초조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는 호수의 절경과 고개를 확 젖혀야 될 만큼 층고가 높은 이 저택과 사랑에 빠졌어요. 보는 순간 구입해버리자 결심했죠. 원래 결정을 빨리 내리는 편인데, 때로는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문제기도 해요(웃음).” 말레네 비르거는 스포츠 브랜드 필라Fila를 소유하고 있는 가족에게서 이 저택의 열쇠를 넘겨받았다. 공식적으로 두 번째 주인이 된 셈이다.
맥시멀리스트의 방대한 컬렉션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지역에서 발견한 집이어도 전면적인 레노베이션은 필요했다. 1905년에 지은 이 유서 깊은 저택은 50년 이상 보수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었다. “빌라를 처음 봤을 때는 마치 축축하고 어두운 동굴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 같았어요. 많은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한 듯 보였지만 아름다운 공간임에는 틀림없었죠. 인상 깊은 저택의 몇몇 디테일만 유지한 채 세심하게 프로젝트에 돌입했어요.” 이 저택 본연의 미학적 요소는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장장 1년이 소요되는 대공사가 끝난 뒤, 말레네 비르거가 전 세계를 여행하며 수집한 예술품과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가구, 빈티지 의류와 보석 등 모든 것을 아우른 그녀만의 작은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저는 스칸디나비아인이지만 미니멀하지 않아요. 오히려 맥시멀리스트에 가깝죠. 몇 년 뒤 이사를 갈지도 모르니 자제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름다운 물건이나 예술품을 보면 그 생각이 사라져요.” 소장한 컬렉션 중 가장 오래된 오브제인 카를로 부가티Carlo Bugatti의 의자들은 이 저택의 표정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별장 곳곳에 놓인 민속풍 가구는 샛노랗게 칠한 벽 덕분에 더욱 신비감을 풍긴다.
영감을 위한 아틀리에
모던한 디자인으로 패션계에 입문한 말레네 비르거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날 가장 과감한 비주얼 아티스트 중 한 명이 됐다. 굵은 붓을 사용해 강렬한 터치로 기하학적 패턴의작품을 만들어냈는데 캔버스, 종이, 리넨 패브릭이나 나무판자 등 그림을 그릴 도구만 있으면 언제든 붓을 든다. 평온하고 고풍스러운 이 저택은 그녀의 시그너처 디자인을 꼭 닮았다. 균형을 유지하고 대조의 매력을 풍기며, 세련됨과 투박함이 공존한다. 말레네 비르거에게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은 언제인지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 요가를 하며 고요한 호수를 내려다보는 순간, 그리고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멍하니 호수를 바라볼 때죠. 바이러스가 지구를 삼키기 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 친구들과 디너파티를 열곤 했는데, 참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말레네 비르거의 소신은 인생에서 의미 있는 날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 그녀의 저택은 밝고 온기 가득한 아틀리에이자 안식처다. 그녀는 혼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이곳에서 비로소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말한다. 절경이 펼쳐진 이곳이 그녀의 고질적인 방랑벽을 붙잡을 수 있을까. “여행은 어린 시절부터 저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며, 계속해서 일과 삶에 영감을 주고 있어요. 더 자유롭게 또 움직여야겠죠.” 그녀는 그곳이 어디든 때가 되면 또 떠날 채비를 할 것이다.
그녀의 작업실 한편에는 아트 작업을 위한 도구와 함께 어머니의 사진이 놓여 있다.
줄무늬가 돋보이는 대리석 바닥과 벽, 카펫이 어우러져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욕실.
에스닉 무드를 연출해주는 침대 헤드피스는 원래 룸 디바이더로 제작한 것으로 그녀가 직접 디자인했다. 침대 앞에 놓인 벤치는 카를로 부가티의 작품.
writerWoo Juyeon객원 에디터 editor Lim Jimin
photographerBirgitta Wolfgang Bjørnv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