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시즌에 맞춰 해외여행을 준비 중이라면 주목하자. 미국과 유럽 각 지역의 색깔을 고스란히 담은 건축 기행부터
미식 여행까지 겨울이기에 더욱 매력적인 여행지를 제안한다.
프랑스 파리 9구, 오스만 양식 건물이 주를 이루는 거
리 사이에서 눈에 띄는 건축물이 있다. 아르데코, 아치형
창문, 스투코stucco 장식이 돋보이는 예술적인 건물 한
채. “특별히 파리시에서 보존하는 몇 안 되는 18세기 스타일의 건물 중 하나예요. 이런 곳을 개조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건 건축가의 로망이죠.” 하지만 이 집의 건축 프로젝트를 담당한 프랑스 건축가 마리 데루딜Marie
Deroudilhe은 욕심보다 고민이 앞섰다. 시대의 유산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내부를 실용적으로 개조하는 것은 무한한 도전이고, 집주인 에마뉘엘 드 레코테Emmanuelle de
l’Ecotais의 날카로운 취향까지 만족시켜야 하는 과감한
혁신이 필요한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에마뉘엘은 2001년부터 2018년까지 파리 현대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고, 이후 사진 전문 페어 ‘포토 데이즈’ 설립자로 활동하는
아티스틱한 인물. 게다가 그녀는 인생의 빛과 그림자 같은
방대한 현대사진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으며, 남편과 자녀
4명이 거주하는 집이 단순한 집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 주
인공인 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랐다.
빛과 그림자, 예술과 고요
몇 달을 고민한 끝에 이 깐깐한 프로젝트를 받아들인 건축가는 집 전체 설계도를 다시 그려보자고 제안했다. 사진 작품을 가장 돋보이게 하려면 대단한 가구와 구조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빛을 온전히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서남북을 뒤틀기로 했죠. 이
리모델링 프로젝트는 집을 처음부터 짓는 것 같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어요. 집 뒤 북쪽 아치형 통로를
현관과 복도로, 창고를 정원으로, 집 앞 남쪽 정원을 거실과 다이닝 룸으로 개조하면서 커다란 유리 지붕을 설치하려 했죠. 해가 뜨는 순간부터 집에 환한 빛이 모일 수 있게 말이에요.” 본래 야외였던 거실과 다이닝 공간은 지붕을 덮고
4개의 벽을 설치해 ‘집 속의 집’을 만들기로 했다. 벽에서 바닥까지 새하얀 페인트로 뒤덮은 공간에는 위대한 사진가이자 화가 만 레이Man Ray의 작품부터 미국 서부의 대자연을
렌즈에 담아낸 대가 앤설 애덤스Ansel Adams, 매그넘 다큐멘터리 사진가 토마스 휩커Thomas Hoepker, 회화적 인물을 포착하는 피에르 고노르Pierre Gonnord, 초현실주의 여성 사진가 발레리 블랭Valerie Belin, 영상과 사진 매체를 오가는 부부 사진가 브로드베크&드 바르부아Brodbeck&de
Barbuat 등의 명작을 걸었다. 태양이 움직일 때마다 수직으로 내려온 빛은 작품에서 또 다른 작품으로 천천히 옮겨간다. 문득 고개를 들면 지붕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따스한 해를 누리며 푹신한 소파에
앉아 시선을 조금씩 옮기면서 온종일 사진 작품만 감상하고
싶은 곳이다. 에마뉘엘은 빛과 그림자, 예술과 고요가 공존하는 이곳이 마치 갤러리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어 마음에 꼭 든다고 전했다.
창 하나, 그 자체로 작품이 되는 집
집주인의 소장 예술품이 공간에서 제대로 숨 쉴 수 있도록
여백을 만드는 동안 건축가는 실용성과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해 현명하게 조합했다. 기둥 아래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는 벽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배열한 책장과 수납장을 두었다. 기둥 뒤편에는 부엌이 자리한다. 정원이 보이는
볕 좋은 명당이었는데 개조를 거치면서 어둡고 침침한 곳이
되어버린 장소다. 건축가는 디자이너 파트리시아 우르키라Patricia Urquiola의 과감한 컬러에서 영감을 얻어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아쉬운 공간이 있다면 부부의 침실이에요.
4명의 자녀에게 정원이 잘 보이는 방을 양보하고 나니 가장
좁고 해가 잘 들지 않는 공간이 남았죠. 고민 끝에 높은 천장고를 살려 계단을 만들고 메자닌 형식의 2층 공간으로 꾸몄어요.” 침실 위에 생긴 여유 공간은 드레스 룸이자 은둔의 비밀 장소로 탈바꿈했다. 이 공간은 테이블과 의자 하나뿐이지만 쉼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곳에 앉아 쉬고 있으면 숨통이 탁 트여요. 아치형 창문 하나가 거대한 사진 작품처럼 느껴지죠.” 에마뉘엘은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창문과 해가 들어오면 더 밝고 화사하게 빛나는 모노톤 벽 그리고 바닥 덕분에 안팎의 경계가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바로 이 방의 묘미라고 설명한다. 올
빛을 머금은 공간에서 감상하는 예술품
집주인 에마뉘엘은 갤러리에서 대형 전시를 준비하듯 집 안
곳곳에 사진 작품과 가구를 신중히 배치했다. 사실 그녀는
만 레이의 오랜 팬이다. “만 레이는 사진작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화가, 조각가, 작가, 영화감독 등 창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낸 예술가예요. 그림으로 그리고 싶지 않은 것을
사진으로 담고, 사진으로 전하지 못하는 것은 손수 그려내죠.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담아내려했던 실험 정신과 열정이 느껴져 더 자세히 보고 싶어져요.”
그녀는 자신의 인생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 레이의
작품을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고 본인 스스로 즐기고 싶은
공간에 걸기로 했다. 진귀한 만 레이 컬렉션이 책장 속에 조
심스럽게 감춰져 있다.
“
프레임 크기는 작지만 웅장한 자연을 마주하는 것 같아요. 카메라 앵글을 통해 자연 풍경을 감상하는 것 같달까. 거실에 앉아 있지만 흙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 같죠.
”
흥미로운 사실은 이 집에서는 조명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어둠도 자연의 일부인 만큼 작품 감상 또한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이면 가족은 자연스럽게 활동을 멈추고 방으로 가서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한다. 덧붙여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바이오리듬이 맞춰지니 건강해진 느낌마저 든다고 전한다. 차분히 흐르는 시간을 집에 온전히
담기 위해 건축가는 정교한 설계 작업에 매달려 고생하면서도 집주인과 함께 자연 재료로 대리석 테이블, 나무 책장, 철제 옷장 등을 직접 제작했다.
가족을 위한 현재진행형 공간
이 집은 모든 디테일을 고려해 꼼꼼히 시공을 마치기까지
3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하지만 그렇게 검토와 수정을 반복하는 동안 집주인은 단 한 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수
백 년을 품은 공간인 만큼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실용성과 목적에서 약간 벗어나더라도 괜찮다는 것이 집주인
과 건축가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사실 집은 미완성 상태다. 지하에 여섯 식구의 취향을 반영한 라이프스타일 공간을 만들고 있기 때문. 와인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와인을 저장하고 테이스팅할 수 있는 실내 와이너리를, 운동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홈 짐을, 가족 모두를 위해 홈시어터를 계획 중이다. 오롯이 가족만을 위한 공간이 언제
완성될지 모르지만 그곳에도 사진 작품이 자리할 것이고
꼭 필요한 물건만 둘 생각이라 말한다. “이 집에 이사 오면서 가구와 소품을 꽤 많이 버렸어요. 하지만 허전하거나
공허하지는 않아요.” 집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빛이 계속
바뀌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에마뉘엘은 스스로가 그렇게
자연을 좋아한 사람이었나 싶을 만큼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