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DIC CHRISTMAS IN BAROQUE
덴마크의 차가운 겨울 숲에서 발견한 메마른 잎과 나뭇가지, 불에 그을린 돌멩이, 모진 추위를 이겨낸 야생화, 오래되어 낡고 바랜 오브제. 오트 쿠튀르 패션 디자이너 앤 위버그Ann Wiberg는 시린 눈보라를 맞으며 안으로 생명을 키워내는 자연을 소재로 바로크 스타일의 크리스마스 풍경을 창조했다.
작업실은 한적한 교외에 자리한다.
패션 디자이너의 시계는 컬렉션 단위로 움직인다. 컬렉션이 끝나면 바로 다음 컬렉션을 준비하고, 남들보다 일찍 다음 해를 맞이하는 것. 크리스마스 시즌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화려한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서두르는 고객을 위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일에 박차를 가하며 몰두한다. 덴마크 코펜하겐에 살고 있는 오트 쿠튀르 드레스 전문 디자이너 앤 위버그Ann Wiberg는 변화와 유행이라는 패션의 속성에서 성큼 벗어나 자신만의 호흡으로 살아간다.
덴마크 코펜하겐 중심가에 위치한 250m2 규모의 앤의 집. 이곳에서 그녀는 고객들을 만나고 샴페인을 마시고 밤새도록 대화를 이어가며 그들의 취향, 습관, 관심사를 알아나간다. “제 옷을 입은 고객들과 많은 대화를 나눠요. 하지만 요구 사항을 일순위로 여기기보다 그들이 알지 못했던 취향을 알려주고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요소를 비트는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옷을 입는 사람의 매력을 끌어내고 신체와 어우러지는 옷을 고민합니다.”
장식과 절제, 바로크 시대로의 귀환
프랑스 파리에 있는 패션 학교 스튜디오 베르소Studio Ber ot를 졸업하고 파리와 코펜하겐을 오가며 자신만의 레이블을 천천히 성장시킨 앤 위버그. 그녀의 집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영화배우 페넬로페 크루즈Pene´lope Cruz, 커스틴 던스트Kirsten Dunst, 미국 부통령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 같은 유명인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HBO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 <트루 블러드>에서도 시그너처 라인 트래시 쿠튀르Trash-Couture 드레스가 등장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트래시 쿠튀르는 명품 패션 하우스 고급 원단에 앤티크 보석, 레이스, 자수, 단추 등 다양한 오브제를 믹스 매치하고, 기본 의복 디자인 형식에서 탈피한 해체주의 감각을 더한 드레스다. 앤이 지향하는 고유의 스타일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모던 바로크Modern Baroque’라 할 수 있다. 기묘할 정도로 풍부하고 호화로운 장식과 다채로운 색채감을 중시했던 바로크 시대 복식을 추구하면서 블랙, 화이트, 그레이 등 절제된 컬러로 현대적 세련미를 더하는 것. 앤티크 보석, 깃털, 프릴, 자수 등 화려한 장식은 물론 몸에 착 달라붙는 코르셋 드레스지만 인물 초상화와 인체 해부학을 연구한 덕분에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활동적이다. “패션 디자이너는 시대를 예측하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그런 숙명을 거스르고 패션이란 장르에서 탈피하고자 해요. 입지 않고 벽에 걸거나 미술관에 옮겨놓아도 손색없는 예술 작품을 만들려는 거죠. 누가 봐도 앤 위버그의 작품임을 알 수 있는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시대를 가뿐히 초월한 것 같은 그녀의 드레스는 집이 아니라 작업실에서 완성된다. 집에서 고객을 만난 후 차를 타고 30분 거리에 있는 노스 질랜드North Zealand의 작업실로 향한다. 버드나무, 은사시나무, 자작나무, 참나무 등이 하늘까지 뒤덮은 숲에 자리 잡은 100m2 남짓한 공간. 문을 두드리는 이 하나 없는,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숲속 오두막에서 자발적 은둔자가 되어 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구상하고, 타인의 삶을 짐작한다.
땅과 하늘이 이어진 눈 내리는 풍경
숲에 면한 사각형 땅에 우뚝 서 있는 작업실. 작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일부러 조용한 장소를 택했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자연을 원했을 뿐이에요. 자연과 제 작업은 돈독한 연결 고리를 지니고 있거든요. ‘불완전성’이죠. 꽃과 식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것도 완벽한 대칭은 없어요. 미완성 속 조화와 아름다움이 느껴지죠. 제 해체주의 작업도 그런 불완전성의 연장선에 있어요.” 동굴처럼 텅 빈 집을 원했던 그녀는 천장고 높은 매력적 공간을 찾았다. 집을 채우기보다 빈 상태, 즉 보이드void로 가득 찬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여유와 여백을 강조하기 위해 그녀가 한 첫 번째 일은 한쪽 벽을 모두 창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지붕 가까이, 바로 아래에도 창을 냈다. 덕분에 하루 종일 빛이 듬뿍 스며든다. “벽을 창으로 바꾸면 단열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죠.그렇지만 네모난 창으로 호젓한 숲과 사계절의 마디마디가 보이니 하루 종일 작업실에서 일한다고 해도 억울하지 않아요. 밖으로 보이는 새하얀 세상을 벽으로 가둘 수는 없었어요.” 특히 눈 내리는 날에는 땅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진다. 서 있을 때와 앉아 있을 때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 무엇보다 네모난 창은 오후 3시만 돼도 어두워지는 혹독한 덴마크의 겨울을 이겨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덴마크인은 한 줄기 빛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했고, 공간에 빛을 아름답게 끌어들이는 건축물을 짓고자 했다. 각자 표현 방식은 다를지언정 대부분 기하학적 단순함과 실용성, 유기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녀의 작업실 또한 피트 몬드리안의 추상화처럼 블랙&화이트 벽이 수직과 수평으로 교차하는 외관은 물론 화이트 페인트로 마감한 천장까지 노르딕 미니멀리즘 분위기를 풍긴다. 깃털, 자수, 앤티크 오브제를 이리저리 매달고 해체하는 분주한 손길이 오가는 작업실이라 하기에는 말끔히 정리되어 있는 편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명상하듯 창가에 앉아서 고요하게 보내요. 옷을 만들기 전 머릿속에서 디자인을 하는 거죠. 그렇게 사유를 거듭한 끝에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녀에게 패션이란 고객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생각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이다. 마치 식물이 자라나듯이 말이다.
겨울 숲의 생명력을 담은 크리스마스 오브제
눈이 내리면 작업실은 더욱 적막하지만 대지에 고요하게 쌓이는 눈송이는 그녀의 마음을, 세상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적요한 작업실이 다시 시끄러워지고, 창작의 동굴에서 슬며시 빠져나오는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뿐이다. 보통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시점에 지인을 초대해 함께 식사하거나 패션쇼를 연다. 올해는 플로리스트 말로우 카버그Malou Karberg와 함께 대형 크리스마스 데커레이션 프로젝트를 펼쳤다. “근처 숲에서 발견한 메마른 잎, 나뭇가지, 돌, 이끼, 그리고 이름 모를 야생화를 이용해 거대한 침묵으로 둘러싸인 겨울 숲을 공간에 펼쳐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단,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레드와 그린 컬러는 사용하고 싶지 않았어요. 오너먼트로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도 뻔하잖아요. 자연의 소중함을 되새겨야 하는 때인 만큼 겨울 숲이 품고 있는 생명력을 풀어내보고 싶었어요.” 새하얀 눈으로 덮인 듯 화이트 컬러 페인트로 마감한 공간. 그녀 말대로 예측 가능한 크리스마스 장식은 없다. 크리스마스 리스는 메마른 잎사귀를 이용해 테이블을 둘러싸면서 바닥에 놓여 있고, 번쩍이는 트리 대신 숲에서 구한 나뭇가지와 솔방울, 솜털 같은 아스파라거스 잎사귀를 이용한 오브제가 샹들리에처럼 걸려 있다. 화룡점정은 테이블 위다. 이끼와 양치식물이 자라나는, 침묵으로 덮여 있는 땅의 풍경을 구현했다. “의자에 앉아 천천히 들여다보세요. 마른 석류, 블랙 체리, 초콜릿 등 달콤한 과일과 디저트가 숲속에 숨어 있죠. 책 〈플랜트 베이스드 푸드Plant Based Food〉의 저자 티나 카스모세Tina Casmose가 앤티크 보석, 단추, 오브제 형태와 질감에서 영감받아 만든 비건 디저트입니다. 맛을 음미하며 자연을 들여다보면 잡초 하나, 풀잎 하나마다 제각기 아름다운 모양새를 띤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렇듯 존재감 없는 돌과 나뭇가지도 크리스마스 오브제로 변신했다. 폐허처럼 메마르고 어두운 그림자에 묻혀 있는 것들이 어느 순간 반짝인다. 그녀는 크리스마스 풍경에 슬픔과 기쁨, 고통과 환희, 삶과 죽음을 담고자 했다. 삶과 죽음은 이렇게 한데 엉켜 있고,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어둠 속에서 영원을, 빛 앞에서는 품격을
작업실과 달리 집은 여유롭고 간소한 일상으로 가득하다. 공과 사의 공간이 확실히 구분되는 구조로 침실, 부엌, 욕실로 이어지는 복도 문을 닫고 3m짜리 대형 테이블이 놓여 있는 거실에서 고객을 만난다. “만남이 길어질 때면 게스트 룸을 내주기도 해요. 외국에서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죠. 일정이 바빠 직접 찾아오지 못하는 이들과는 웹캠으로 만납니다. 몸에 맞게 사이즈를 스스로 줄일 수 있도록 특별 제작 드레스를 보내죠.” 집 안 크리스마스 데커레이션 아이디어도 소박하다. 데니시 크리스마스에 빠질 수 없는 다양한 크기의 캔들로 집 안 전체를 밝힐 예정이라고. 캔들 컬러는 블랙으로 낙점했다. “사람들은 블랙을 어둡고 건조한 컬러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편견이에요. 바닥부터 천장까지 블랙 컬러로 통일했을 때 전해지는 예술적 감도가 있어요. 게다가 자연과 연결 고리가 있죠. 선명한 컬러가 돋보이는 것은 짙고 어두운 땅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둠 속에서는 영원을, 빛 앞에서는 품격을 드러내는 블랙. 그녀는 블랙 컬러를 집 안 곳곳에 매치했다. 그녀의 옷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개성과 발상이 선명히 드러난다. 블랙·화이트·그레이 컬러로 통일한 점도 그렇고, 앤티크 오브제를 적절히 활용하고 블랙 컬러 배경 그림이 걸려 있는 점도 비슷하다. 신체 움직임, 표정뿐만 아니라 해골 모티브를 활용한 기묘한 그림도 알고 보면 사람을 향하고 있다. “그림은 저에게 타인을 이해하는 통로라 할 수 있어요. 비워내는 과정이죠. 복잡한 마음을 정리해야 타인의 이야기를 충분히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를 떠올리며 말하지 못한 감정을 전할 수도 있고요. 생각해보니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딸에게 그림을 선물해야겠네요.”
그녀가 소개하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딸아이가 만든 오브제와 그림이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엄마 키를 훌쩍 넘을 만큼 성장한 딸과 그림을 그리면서 나른한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writerGye Anna, Monica Spezia
editorKim Minhyung
photographerMichael Paul
참고 @ann_wiberg_couture, www.annwiber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