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IC LIFE
디자이너 필리프 라핀과 〈엘르 데코〉 편집장 출신인 실비 드 치레의 예술적인 파리 하우스.
메종 필리프 갤러리의 오너답게 세계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모아온 그만의 취향이 담긴 물건과 맥시멀리즘에 대하여.부부가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르는 거실. 영국 아티스트 마크 카벨Marc Cavell의 레드 컬러 모빌 조각품 아래 놓인 화이트 컬러 사파리 프린트 소파는 1968년 이탈리아 디자인 스튜디오 아르키촘의 작품.
물건 수집가와 이야기 수집가의 만남
<엘르> 매거진 에디터를 거쳐 <엘르 데코>를 창간하고 이끌었던 저널리스트 실비 드 치레Sylvie de Chire´e와 필리프 라핀의 만남은 앤티크를 넘어 현대 디자인 가구 수집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필리프의 아내 실비 드 치레는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Arde`che에서 태어났고 시골에 있는 기숙학교를 다녔지만 가족과 함께한 추억은 대부분 지금 가정을 꾸린 이 공간에 스며 있다고. “방학 때마다 파리 집에 들르면 무언가 달라져 있었어요. 부모님 모두 인테리어 디자인에 대한 안목이 높고 앤티크 물건을 좋아하셨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견문을 넓히고 편견 없는 취향을 키우면서 전문 저널리스트의 자질을 갖추게 된 것 같아요.” 그녀는 1981년 5월, 매거진 <엘르>에 인턴으로 입사해 2000년 편집장이 됐고, 7년 뒤 <엘르 데코>를 창간해 이끌었다. “매거진 일이라는 것이 사물 또는 인물에 담긴 숨겨진 스토리를 찾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물건의 경우 시대, 스타일, 형식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어야만 글을 쓸 수 있죠. 남편 필리프가 물건 수집가라면, 저는 이야기 수집가인 것 같아요.” 그녀는 부모님의 집을 물려받아 개조하거나 확장하지 않고 남편과 자신의 수집품을 믹스매치 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꾸렸다. 고전에 능숙한 남편과 새로운 이슈에 익숙한 아내. 두 사람은 낡고 새로운 지식을 서로 주고받으며 컬렉션을 대담하게 키워갔다.
오래된 물건이 지닌 새로운 생명력
침실 5개, 욕실 2개, 거실 2개로 이뤄진 이곳은 한때 자라나는 아이들로 북적였지만 모두 독립하면서 부부 둘만의 집이됐다. 건물이 지어진 1910년대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기억이 녹아 있는 공간 자체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싶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변화만 적용했다. 필리프 라핀의 말처럼 사라진 흔적이 남은 자리는 우리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는 평범한 물건을 집에 들고 와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진가를 발견하는 것을 가장 뿌듯해한다. 두 사람은 커다란 아파트에 세계각국에서 구입한, 자식처럼 귀한 수집품을 채우고 있다. 매번 달라지는 오브제 덕분에 매주 이사하는 기분이라고 농담처럼 말한다. “저희 부부는 시대, 스타일, 문화를 섞는 것을 좋아해요. 예를 들어 포르나세티Fornasetti 도자기 옆에 17세기 튀르키예 책장과 1940년대 램프를 배치하는 식이죠. 오브제들끼리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특유의 이질감과 불협화음이 창의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낸답니다. 마치 한 편의 극을 위한 예술 무대를 꾸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오브제 사이에 맺은 특별한 인연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가장 뛰어난 예술 무대 중 하나로 욕실을 꼽는다. 모자이크 대리석 타일과 20세기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민 욕실은 어떤 공간보다 화려하다. 19세기 샹들리에, 1950년대 디자이너 피에르 루이지 콜리Pier Luigi Colli의 옷걸이 등 앤티크 오브제와 욕실 가구가 조화롭게 공존한다. 이 집의 가구 중 상당수가 다른 시대, 다른 장소의 것이지만 마치 한 컬렉션처럼 딱 맞아 떨어지게 매치한 점도 눈길을 끈다. 부부가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르는 거실에 놓인, 1968년 이탈리아 디자인 스튜디오 아르키촘Archizoom에서 디자인한 화이트 컬러의 사파리 프린트 소파와 1950년대에 제작한 피에르 루이지 콜리 스툴 같은 경우다. 사파리 프린트와 곡선 브라스 다리가 마치 한 세트처럼 보인다. 필리프 라핀이 디자인한 캄 틴Kam Tin의 황동 팜트리 조각상이 놓인 미니 살롱에서도 실비 드 치레의 믹스매치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골드빛이 선명한 1940년대 무라노 샹들리에, 앤티크 벽지와 함께 부부가 직접 제작한 캄 틴의 골드 컬러 클라우드 테이블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면 균형, 형태, 컬러 등 디자인을 고려해 물건을 배치하겠죠. 하지만 저는 다양한 연결 고리를 고려해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오래된 물건은 단지 지난날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대를
통과하고 나의 것이 되면서 또 다른 존재가 됩니다.
오히려 저에겐 오래된 물건이
더욱 새롭고 낯설고 생명이 꿈틀거리는 존재로 다가와요.”
대형 거울벽과 1910년대 앤티크 벽지로 마감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미니 살롱. 덴마크 디자이너 굴리엘모 울리크Guglielmo Ulrich의 핑크 벨벳 소파, 캄틴Kam Tin의 클라우드 테이블이 어우러졌다.
사람을 끌어모으는 힘
부부가 가장 공을 들인 곳은 대형 팜트리 조각상이 눈에 띄는 미니 살롱. 이곳은 사방에 앤티크 벽지를 바르고 신비스러운 대형거울이 있어 실제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저희 부부는 이렇게 여러 물건에 둘러싸여 보내는 시간을 즐겨요. 물건을 보며 언제 어디에서 샀고, 왜 끌리게 됐는지 온종일 이야기 나눌 수 있으니까요. 비즈니스로 만난 사람들도 이 집에 오면 금방 화기애애해지죠.” 필리프 라핀은 작은 만년필 하나로도 거기에 깃든 시간과 노력을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꾼이다. 그가 컬렉터에서 자연스럽게 딜러가 되고 직접 가구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도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매일 꿈꾸게 만드는 예술
필리프 라핀은 1978년 도자기 전문 갤러리 ‘라핀 메종’을 연 뒤가구, 조명을 포함한 앤티크 물건을 함께 소개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는 브뤼셀과 런던에도 갤러리를 만들었고 마침내 홍콩까지 진출해 디자이너로 자신의 영역을 넓혔다. 튀르쿠아즈,호박 등 주얼리로 장식한 가구 브랜드 캄 틴을 론칭한 것. 캄 틴은 그의 치열한 수집욕과 창작욕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필리프라핀은 9월부터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주 무대로 20-21세기 가구와 예술 작품을 소개할 예정이다. 샤넬의 충실한 공예가 로베르 구센스Robert Goossens,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금 세공 아티스트 장 드프레스Jean Despre´s, 이탈리아 건축 디자인의 아이콘 조 폰티Gio Ponti 등 20세기 주요 예술가들이 만든 가구를 선보이고자 한다. “어떤 이들은 컬렉터, 딜러, 디자이너는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각자의 예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모두 예술가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티스트 요셉 보이스가 그랬죠.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제가 겪은 경험과 노하우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점과 스토리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은 끝이 없어요. 계속해서 저를 꿈꾸게 합니다.”
writerGye Anna
editor Lim Ji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