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태양 아래 해변에서 우리는 다른 계절이라면 꿈꾸지도 못할 만남을 꿈꾼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채 도시로 돌아온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는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금방 식어서 사라지는, 여름이라는 계절의 본질이 담겨 있다.
에릭 로메르 ÉRICROHMER
1920년 3월 21일 프랑스 코레즈의 튈에서 출생. 비평가, 소설가, 교사, 영화잡지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1959년 장편영화〈사자 자리〉로 데뷔, 1967년 〈수집가〉로 성공을 거둔 뒤 1969년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으로 국제적 입지를 다졌다. 누벨바그의 거장이자 비밀스러운 심미주의자로 알려진 그는 작품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관계를 섬세하게 조명했다. 2010년 1월 영면에 들었다.
단 하나의 이름
여름이라는 계절 앞에서 당신은 어떤 영화감독을 떠올리는가. 영화광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단 하나의 이름을 꺼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수라면 몇몇 이름을 떠올릴 수 있다. 경쾌한서프 음악 ‘서핀 유에스에이Sufin’ USA’와 ‘코코모Kokomo’의 주인공 비치 보이스라면 훌륭한 답변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며 ‘해변의 여인’ 등 여름을 겨냥한 댄스곡을 계속내놓은 쿨은 어떤가. 하지만 영화감독?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여전히 머릿속으로 여름에 대한 영화를 만든 사람들을 떠올리려 노력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영화광이라면? 답변은 하나, 에릭 로메르다. 그렇다. 프랑스 감독이다. 여기서 이 글의 진입 장벽이 생긴다. 요즘 세상에 누가 프랑스 영화를 보는가. 프랑스 영화는 더 이상 쿨하지도 힙하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에릭 로메르라는 감독을 꼭 알아야 한다고 설법할 생각이다. 더심각하게 말하자면, 에릭 로메르를 아는 것은 당신의 ‘영화적교양’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정말이다. 물론 에릭 로메르는 그리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그를 알기 위해서는 영화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미리 숙지할 필요가 있다. 에릭 로메르는 영화 역사상 가장 거대한 혁명 중 하나였던 누벨바그 출신 감독이다. ‘새로운 물결’을 의미하는 누벨바그는 1950년대 젊은 프랑스 감독들이 이전에 만든 영화의 문법에 저항하고자 탄생시킨 운동이다. 영화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조차도 이름은 들어본 적 있을 아녜스 바르다, 장뤼크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감독이 누벨바그의 대표 일원들이다. 그들은 1950년대까지 할리우드와 프랑스에 넘치던 고전주의적 영화 스타일을 비판한 젊은 평론가였다. 무엇이든 글로비판하는 건 한계가 있지 않나. 그들 역시 직접 카메라를 들고 영화 현장에 뛰어들었다.
누벨바그는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준비해서 스토리보드 그대로 찍어내는 고전적인 영화로부터의 탈출이다. 누벨바그 감독들은 현장에서 모든 것을 발견했다. 이전 영화에서는 거의 쓰지 않던 ‘핸드헬드handheld’ 촬영을 선호했다.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그립을 잡은 채 촬영하는 이 기법은 이야기보다는 이미지의 힘을 강조한다. 당시 누벨바그를 가장 대표하는 기법은 ‘점프 컷’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점프 컷은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연기자의 여러 행동을 뚝뚝 끊기듯 부자연스럽게 편집으로 연결하는 기법을 말한다. 누벨바그의 형식적 특징인 핸드헬드와 점프 컷은 지금은 이미 익숙한 대중 영화의 촬영 기법이 됐다. 여전히 어렵다고? 당신은 그저 몇 명의 젊은 프랑스 영화광 출신 감독들이 현대 영화의어떤 흐름을 바꿔놓았다는 정도만 이해하면 된다. 어차피 이글을 읽는 당신은 영화 역사를 공부하는 영화광이 아니고 이 글 역시 논문은 아니다.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
"에릭 로메르의 남녀들은 파리와 해변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깨닫는다.
욕망과 사랑 뒤에 남는 건 희극적이고도비극적인 인생의 순간이라는 것을."
사실 에릭 로메르는 뒤늦게 발견된 거장이다.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이 성공을 거두던 1960년대까지도 그의 연출작들은 그다지 조명받지 못했다. 그런데 1969년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이 대중적·비평적 성공을 거두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사실 이 영화의 내용은 정말이지 간단하다. 두 남자가 모드라는 여성의 집에서 보내는 하룻밤을 담고 있을 따름이다. 중요한 건스토리가 아니다. 대화다. 에릭 로메르는 남자 있는 여자를 꼬시고 싶어 하지만 이성에 억눌린 남자, 그 남자를 꼬시고 싶어하는 자유분방한 여자, 둘의 욕망을 응원하는 남자의 긴 대화를 그저 카메라로 지켜볼 뿐이다. 에릭 로메르의 카메라는 연출한다기보다는 담아낸다. 40분에 걸친 영화 후반부의 대화 장면은 현실의 삶에서 그저 뚝 떼어낸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소주병을 앞에 두고 나누는 남녀의 궁상맞은 대화로 이루어진홍상수의 영화처럼 말이다.
컬러: 〈여름 이야기〉(1996), 흑백: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1969)
"나는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행동이 아닌 생각을 담은 영화를 만든다."
결코 낯설지 않은 순간
어쩌면 지금쯤 당신은 ‘오호라? 그렇다면 에릭 로메르라는 낯선 감독의 영화를 한번 볼까?’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글은 이미 성공했다. 그러니 나는 이제 이렇게 주장할 참이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반드시 여름에 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작 세 편은 모두 한여름 휴가철에 해변에서 벌어진 어떤 순간을 다룬다. 1983년 작<해변의 폴린(Pauline a`la Plage)>, 1986년 작 <녹색 광선(Le Rayon Vert)>, 1996년 작 <여름 이야기(Conte d’Ete´)>다. 이 세 편의 영화는 ‘에릭 로메르의 여름 영화 트릴로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해변의 폴린>은 열다섯 살 소녀가 이혼한 사촌 언니와 함께 해변가에서 겪는 이야기다. 언니는 연애 전문가처럼 굴지만 딱히 진정한 사랑이 뭔지는 모른다. 소녀는 어른들의 사랑을 경멸하지만 결국 한 남자를 만나 첫사랑에 빠져든다. <녹색 광선>은 여름휴가를 떠난 젊은 파리 여자의 이야기다. 그는 들뜬 해변에서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보지만 자신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다. 그러다가 녹색 광선에 대한 대화를 엿듣는다. 해 질 녘 드물게 발생하는 녹색 광선을 보면 자신과 타인의 진실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기차역에서 만난 남자와 해변으로 가고, 결국 녹색 광선을 본다. 제목부터 여름이 가득한 <여름 이야기>는 휴양지 생뤼에르로 떠난 청년의 이야기다. 수학자인 그는 지나치게 내성적이어서 여자를 만나는 게 어렵다. 그는 애인이 휴양지에 도착하길 기다리다가 두명의 다른 여자를 만난다. 휴가가 끝나가는 순간까지 여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그는 결국 선택을 해야만 한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로메르는 “나는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행동이 아닌 생각을 담은 영화를 만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 로메르의 영화에 서 어떤 구체적인 이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의 캐릭터들은 사랑을 찾기 위해 걷고 먹고 마시고 대화한다. 그러나 로메르의 영화에는 우리가 모든 영화에서 기대하는 진정한 결말 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름의 청년들은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 처럼 진정한 사랑을 찾는 해피 엔딩으로 향하지 못한다. 해변 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하는 순간, 영화는 갑작스럽게 막을 내린다.
여름의 본질
그것이 여름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지루하게 펼쳐진 해변에서 우리는 다른 계절이라면 꿈꾸지도 못할 만남을 꿈꾼다. 염원한다. 기대한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채 다시 도시로 돌아온다. 로메르의 여름 영화에는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금방 식어서 사라지는 여름이라는 계절의 본질이 담겨 있다. 우리는 해변에서 만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해변에 쏟아지던 강렬한 햇빛은 잊지 못할 것이다.해 질 녘 멀리서 쏟아지던 녹색 광선의 아련함은 기어이 기억에 남을 것이다. 에릭 로메르가 여름을 위한 영화만 찍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화에서 여름을 제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에릭 로메르의 여름 영화들은 여름이라는 단어에서 당신이 기억하는 모든 감각을 가장 아름답게 담아낸 ‘순간들’이다. 나는 이 글이 ‘누벨바그 출신 감독의 옛날 프랑스 영화’라는 당신의 마음속 진입 장벽을 태양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녹이기를 바란다. 여름이 오고 있다. 나는 주저 없이 에릭 로메르의 작품을 다시 꺼내볼 참이다.
<해변의 폴린>
writer김도훈, 영화평론가
editor Kim Minh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