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를 재미있게 읽었다. 친구들과 함께 한국에서 번역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책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하루키의 소설들은 읽어도 거의 기억을 하지 못한다. <해변의 카프카>는 물고기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면 정도가 기억에 남았고, <1Q84>는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풍경이 인상적이었을 뿐
역시 내용은 다 잊어버렸다. 출세작 <상실의 시대>도 분명히 읽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어 다시 정독을 했는데, 지금 떠올려보면 줄거리조차 희미하다. 어쩌면 하루키의 판타지풍 작품 세계가 내 취향에 안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면 작가가 직접 몸으로 부딪친 것을 쓴 <먼 북소리>나 <우천염천雨天炎天> 같은 여행기는 읽은 지 오래됐어도 장면들이 생생하다. 그가 음악에 대해 마음먹고 쓴 <의미가 없다면스윙은 없다>도 감탄하며 읽었다.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는 작가가 소장한 클래식 레코드 가운데 1백 곡의 음악을 수록한 LP를 곡당 몇 장씩 골라 소개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클래식 음반 가이드와는 거리가 멀다. 초심자가 안내서 삼아 읽으려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들 것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모으고 애장하는 1950~1960년대의 모노음반을 주로 소개하며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를
짧게 메모하듯 썼을 뿐이다. 음반 한 장에 대한 글이 다섯 줄 남짓이고 연주가나 지휘자, 악단에 대한 설명 따위는 거의 없다. 그래도 불친절하다는 느낌은 없다. 한 줄 한 줄 짚어가며 읽다 보면 음악과 음반에 대한 저자의 깊은 이해와 애정이 느껴진다. 대한민국 음반 최고수라 일컬어지는 내 친구도 책을 읽고는 “좀 겸손해져야겠다”고 고백했다.
하루키가 언급한 음반 한 장을 구입했다. 클리블랜드 현악 사중주단과 첼리스트 요요마가 협연한 슈베르트의 현악 오중주 D.956 음반이다. 그는 이 음반만 들으면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져 소파에서 새근새근 잠들어버린다고 했다. 절대 따분한 연주가 아닌데 이상하다고, 잠자고 싶을 때 애용도 했다며 독자들도 한번 시험해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내가 이 음반을 구
한 것은 과연 잠이 오는지 궁금해서가 아니다. 클리블랜드 사중주단이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과 연주한 슈베르트 ‘송어’ 피아노 오중주가 신선했던 기억이 있고, 내가 소장한 두 장의 슈베르트 현악 오중주 음반들이 모두 옛 녹음이라 디지털 녹음으로 한번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슈베르트는 1828년 가을, 죽기 몇 주 전에 현악 오중주를 썼다. 선배 모차르트의 현악 오중주 악보를 살펴봤지만, 모차르트가 현악 사중주에 비올라를 보탠 것과 달리 슈베르트는 첼로를 더해 저음을 보강했다. 다른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슈베르트는 첼로의 깊고 그윽한 소리를 좋아했다. 이 작품은 느린 2악장이 유명하다. 그런데 내내 느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별안
간 음악은 격정에 빠져들고 분노와 저항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3악장도 갑자기 흐름이 바뀐다. 빠른 스케르초가 연주되다 갑자기 툭 끊긴 뒤 비올라가 회상조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어 두 대의 첼로 중심으로 흐르는 음악은 회한과 체념이다.
슈베르트는 마지막 해 가을에 자신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시 쓴 가곡 ‘바위 위의 목동’에서는 새봄을 기다린다. 하지만 현악 오중주 3악장에서 모든 희망을 놔버린다. 운명에 저항하다 결국 체념하고 마는 청년이 눈앞에 떠오른다.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슈베르트의 현악 오중주는 거의 한 시간이 걸린다. 천국처럼 길다. 나는 저항과 분노, 체념까지 듣고 나면 마음이 바닥까지 탈진해 4악장은 듣지 않고 바늘을 내리고 만다. 누구의 연주든 이런 음악을 들으며 어떻게 잠을 잘 수 있단 말인지. 좀 엉뚱한 얘긴지는 몰라도 하루키가 잠에 빠져드는 것은 CD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루키는 LP 애호가지만 CD도 많이 듣고
클리블랜드 음반은 CD라고 했다. LP는 눈에잘 보이지도 않는 다이아몬드 바늘이 울퉁불퉁한 소리골을 고속으로 달리며 소리를 낸다. 작동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지켜보게 되고 그것이 집중력을 높인다. 혹시라도 깜박 졸게 되면 화들짝 놀라서 깬다. 하지만 CD는 다돌아가면 알아서 멈추니 코 골며 자도 사고 날 일이 없다. 나는 이 음반을 LP로 구했다. 의외로
상태가 나빠 ‘틱톡’ 소리가 심했다. LP가 다 돌아갈 때까지 잠은커녕 바늘에 무리가 갈까 노심초사했다. 하루키도 이 연주를 LP로 듣는다면 낮잠에 쉽게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