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골레시:스타바트 마테르
날 위로하신 그분
그런데 우리 동네 성모님은 슬픈 기색 없이 십자가를 한 손으로 붙잡고 서 있을 뿐이었다. 얼굴에 살짝 미소까지 띠고 있어 사진기
앞에 선 시골 처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분
위기였다. 그래서였는지 어느 날 성모상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예수상이 대신 세워졌다. 많이 아쉬웠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성당의
텅 빈 운동장을 천천히 가로질러 가면 성모님
은 나만 알아듣는 위로를 건네곤 했는데, 이제
다신 뵐 수 없게 됐다.
예수는 동족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발당했다. 죄목은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
라고 말한 것이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으나 결국 사형을 허락하고 예수를 그들 손에 넘겨주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사형은 십자가형이었다. 예수는 ‘해골’
이라는 뜻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격렬한 고통 속에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예수에게 못질을 한 네 명의 병사는
예수의 옷을 찢지 말고 한 사람이 차지하자며 제비뽑기를 했다. 성경에 따르면 그 병사들 가까이에 성모마리아가 있었다. <요한복음> 19
장 25절은 ‘예수의 모친과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십자가 곁에 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머니가 계시니 아들이
그 지경에서도 내려다보며 말을 건넨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러고는 제자들에
게 이른다. “보라, 네 어머니라.” 할 수만 있다
면 피하고 싶었으나 하느님 뜻대로 잔盞을 받은 인자人子 예수는 어머니에게 찢긴 육신을
보이며 슬퍼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뒤 남을
어머니를 부탁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건넨 일곱 말씀 중 한마디는 어머니와
의 애끓는 작별이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 중 하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탄생한 기독교에서 십자가 아래 선 성모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는 지극히 애통한 장면으로 기억된다. 팔레스트리나, 스카를라티, 페르골레시, 하이든, 로시니, 베르디, 드보르자크 등 서양 음악의 거장들이 같은 제목의 음악 ‘스타바트 마테르’를 긴 세월 반복해서 지었다. 텍스트는 13세기의 라틴어 종교시
20절로 이루어졌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보는 성모의 비탄, 예수와 성모를 향한 우리의 기도가 내용을 이룬다.
이탈리아 작곡가 페르골레시(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는 독일의 바흐와 일생이 겹친다. 하지만 바흐보다 25년 늦게 태어나 14년 먼저 죽는다. 불과 26년밖에 살지 못했다. 20대 초반부터 오페라와 종교음악, 기악곡을 왕성하게 쓰기 시작했으나 폐결핵에 걸려 나폴리 인근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들어 간다. 그리고 거기서 삶을 마감한다. ‘스타바트 마테르’는 마지막 작품이었는데, 미완성으로 남겨져 누군가가 마무리했다고 전해진다.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소프라노와 알토 두 가수가 현악합주와 함께 부르는 단출한 구성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당시 사람들 귀에 낯설게 들렸다. 작곡가가 전통적인 종교음악 양식과 자신의 분방한 스타일을 번갈아 구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이 무질서하게 뒤섞였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특히 이탈리아 음악이 피상적이고 종교음악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독일인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듣는 순간 몸 서리가 쳐진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성모의 슬픔을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한때 연주가 금지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새로운 시도는 환영을 받아 악보는 유럽 대륙 곳곳에 빠르게 전해졌다. 3백 년이 흐른 지금 나는 유럽에서 녹음된 여러 음반을 비교해가며 듣고 있다.
우리 동네 성당에 새로 들어선 예수상은
눈에 익은 모습이다. 부활 직후의 예수님이 못
자국 선명한 두 손을 벌리고 있다. 새삼 빙그레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하던 성모님이 그립다. 조각가는 일부러 비탄의 성모 대신 친근한
성모를 새겼는지도 모른다. 페르골레시가 인간적인 성모를 그린 것처럼.
writer Choi Jeongdong 기행 작가·칼럼니스트
editor Kim Minh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