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를 획득한 시계
최초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가장 먼저’라는 뜻이지만, 그 속에는 어떤 분야에서 선구적 역할과 미답의 길을 닦아낸 공헌과 성공이라는 의미도 숨어 있다. 최초의 손목시계라는 칭호에는 이를 이루기 위한 과정 속에서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무수한 변화가 녹아 있다. 회중시계와 달리 휴대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부품의 크기와 두께를 줄였지만 내구성은 그대로 유지해야 하고, 손목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고민과 같은 해법의 과정 말이다. 인류사에 얼굴을 내민 다른 최초의 시계도 마찬가지다. 최초라는 칭호를 얻기 위한 시계 브랜드의 도전 정신, 땀과 노력 그리고 혁신이 저마다의 시계에 녹아들어 있다.
VACHERON CONSTANTIN
안티마그네틱 워치와 계승
최초의 안티마그네틱 워치는 바쉐론 콘스탄틴이 내놓았다. 나열할 업적이 너무 많아 그들의 긴 역사에서 종종 언급하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안티마그네틱 워치도 그중 하나다. 팔라듐이나 금과 같은 비철 소재로 무브먼트의 주요 부품을 만들어 자성의 영향에서 벗어났던 바쉐론 콘스탄틴은 본격적인 스포츠 워치 오버시즈에 이를 도입했다. 3세대에 이른 현재에도 오버시즈는 150m에 달하는 방수 능력, 내충격성과 더불어 내자성을 갖추고 있다. 이는 모델·장르의 성격과 연관이 있는데 강력한 스포츠성보다 일상에서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오버시즈에 시계를 착용하면서 신경 써야 할 위협 요소를 직접 차단한 것이다. 내자성, 특히 요즘처럼 랩톱, 스마트폰, 이어폰처럼 생활 속에서 자성과 가까워진 환경을 고려해 자성 차단은 필수 요소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처음으로 비철 소재로 안티마그네틱 워치를 만들었던 바쉐론 콘스탄틴은 라인업에서 가장 편하게 착용하는 스포츠 워치 라인인 오버시즈에 전통을 계승토록 한 것이다.
1 오버시즈 무브먼트인 칼리버 5200
2 1977년에 출시한 오버시즈의 전신 222 모델.AUDEMARS PIGUET
스포츠 하이엔드의 개막
스포츠 하이엔드는 1972년 오데마 피게에 의해 등장했다. 이들이 내놓은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의 로열 오크 Ref. 5402는 시장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고 상당한 위험마저 수반했다. 당시 하이엔드 브랜드의 시계 제작법에 크게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고급 소재인 플래티늄이나 골드 대신 흔하디흔한 스테인리스 스틸을 택했고, 다이빙과 비행 등 특정 목적을 위해 툴 워치로 취급하는 스포츠 워치는 하이엔드 워치 소비자와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골드 드레스 워치에 싫증을 느낀 젊은 부호들에게 호응을 얻기 시작하면서 인기에 불이 붙었고, 이제는 스포츠 하이엔드 장르의 개척자로 기억되고 있다. 전설적 시계 디자이너 고故 제럴드 젠타Gerald Genta의 손끝에서 탄생한 로열 오크는 시계 디자인에서는 보기 드문 팔각형 베젤과 당시 유행하던 일체형 브레이슬릿이라는 골격을 지닌다. 스포츠 하이엔드 계보의 직계인 로열 오크 Ref. 16202는 베리에이션에서 선택의 폭을 넓혔지만 디자인과 디테일에서는 원전을 유지했다. 대신 50년을 지지해온 울트라 신 자동 무브먼트의 걸작 칼리버 2121을 대체할 인하우스 칼리버 7121을 완성해 탑재했다. 칼리버 7121은 칼리버 2121의 두께에 미치지 못하지만 얇은 두께를 이용해 로열 오크 디자인과 프로포션을 유지했고, 칼리버 2121에 없던 스포츠성을 더해 진정한 스포츠 하이엔드로 거듭나게 했다.
1 로열 오크 퍼페추얼 캘린더.
2 로열 오크 Ref. 5402 모델.BLANCPAIN
단방향 회전 베젤을 갖춘 첫 다이버 워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빠른 회복에 접어들던 1950년대에는 스쿠버다이빙이 대중적으로 유행했다. 다이버들이 대거 등장하며 물속에서 사용하는 시계의 수요가 급증했고 다이버 워치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했다. 군대에서도 수중 작전에 사용할 다이버 워치가 필요했다. 프랑스 해군 중령 로베르 말루비에르는 해군 잠수 특수부대 ‘레 나제르 드 꽁바’를 창설하고 이들이 사용할 다이버 워치를 찾았다. 1953년 탄생한 블랑팡의 피프티 패덤즈는 블랑팡의 공동 대표였던 장 자크 피슈테르가 말루비에르에게 의뢰를 받아 완성한 다이버 워치다. 피프티 패덤즈라는 이름은 수심을 재는 단위인 패덤fathom(약 1.8m)에서 따온 것이다. 약 90m 방수가 가능한 다이버 워치라는 의미로 실제로도 신뢰성이 높았다. 다이빙 애호가 피슈테르는 다이빙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시계 반대 방향으로만 도는 회전 베젤로 잠수 시간을 오인하지 않게 했다. 베젤 인덱스를 합성수지로 덮어 야광 인덱스를 보호하는 등 다이버를 위해 세심하게 설계했다. 현대의 피프티 패덤즈는 오리지널 디자인과 고급 무브먼트, 수준 높은 디테일로 하이엔드 다이버 워치라는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
1 수심 300m까지 방수 가능한 피프티 패덤즈 오토매틱 워치
2 1953년에 탄생한 최초의 피프티 패덤즈 모델.BULGARI
케이스 두께 2mm의 벽을 깬 오토매틱 워치
극단적으로 얇은 두께의 시계 또는 무브먼트를 울트라 신Ultra Thin이라고 한다. 제작 난이도, 심플한 기능에 비해 긴 제작 시간 등 시계 제조사의 역량 발휘나 기술적 성취가 주목적이 아니라면 쉽게 도전하기 어려운 장르다. 하이엔드 브랜드는 오랜 기간 울트라 신 제작의 의무라도 짊어진 듯 극도로 얇은 시계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불가리는 울트라 신에서 새로운 도전자지만 10여 년에 걸쳐 그간의 패러다임과 기록을 갱신해왔다. 그중 괄목할 만한 성과는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탑재하고 케이스 두께 2mm의 벽을 허문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다. 과거였다면 두께 2mm는 매뉴얼 울트라 신 무브먼트의 1차 통과 지점에 해당했다. 로터가 달린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탑재하고, 거기에 무브먼트 두께가 아닌 케이스 두께 1.8mm를 실현한 불가리는 이를 위해 부품을 아주 얇게 만들고 수평으로 펼쳐내는 현대적 울트라 신의 방법을 제안했다. 시침, 분침을 레귤레이터처럼 분리 배치했고, 투르비용 케이지는 마치 프레스에 누른 듯한 형태로 완성해 두께를 억제했다. 수직 연결은 두께 증가의 주범이므로 크라운마저 수평으로 장착했다. 이 모델에는 8개의 신기술 특허가 신청되어 있을 만큼 극한의 두께를 위한 노력이 담겨 있다. 앞으로 울트라 신의 기록은 계속 갱신될 듯하지만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가 제안한 얇은 두께를 위한 방법은 끊임없이 답습될 것이다.
1 옥토 피니씨모의 제작 과정 스케치.
2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로 등록된 옥토 피니씨모 울트라.ROLEX
11,000m 깊이에 도달한 상용 다이버 워치
1950년대 후반 200m 방수의 벽을 넘어선 서브마리너는 깊은 물속에서 잠수할 수 있는 포화 잠수 기법에 대응하기 위한 파생형을 내놓는다. 바다의 서식자로 이름 붙은 씨드웰러Seadweller는 더욱 강력한 방수 성능과 포화 잠수에 사용하는 헬륨 가스 배출 솔루션을 갖춰 프로다이버가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사양을 갖췄다. 씨드웰러는 최근 ‘딥씨’라 명명한 고심도 잠수에 대응하는 모델을 내놓고 있다. 2022년 롤렉스가 새로 발표한 롤렉스 딥씨 챌린지는 현존하는 상용 기계식 다이버 워치 중 가장 깊은 수심의 압력을 견딜 수 있다. 무려 11,000m 깊이에 해당하는 수압을 견디는데 50mm 지름과 23mm에 달하는 두께의 육중한 케이스는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압력과 맞서 싸운다. 딥씨 챌린지는 판매용 기계식 다이버 워치로는 처음으로 수심 11,000m의 벽을 허물었다. 100m 방수로 시작했던 다이버 워치의 첫 잠수는 이제 11,000m로 아득히 깊어졌다.
1 오이스터 퍼페추얼 딥씨 챌린지.
2 1960년, 극한의 압력을 견디도록 설계한 실험용 롤렉스 시계 딥씨 스페셜.OMEGA
처음 달을 밟은 시계
나사NASA는 달 착륙에 사용하기 위해 계측 장치가 달린 시계를 찾았고, 나사의 가혹한 테스트를 통과한 유일한 시계는 스피드마스터였다. 이 모델이 바로 1963년에 등장한 3세대 스피드마스터 Ref. ST105.003이다. 우주 비행사들이 직접 사용하면서 개량과 개선을 거쳐 4세대 디자인이 만들어졌다. 스피드마스터는 아폴로 11호의 우주 비행사 버즈 올드린Buzz Aldrin과 함께 역사적 달 착륙에 성공해 처음 달을 밟은 시계로서 ‘문워치moonwatch’ 칭호를 받게 된다. 이후 스피드마스터는 세대를 거듭해 현행 모델인 Ref. 310.30.42.50.01.002에 이르며 크로노그래프 아이콘의 하나로 손꼽힌다. 아이콘과 같은 시계는 그 위상만큼이나 변화를 꾀하기 어렵다. 스피드마스터 또한 마찬가지지만 면밀한 개발을 통해 디테일을 미세 조정하고, 내자성 같은 현대적 사용성을 반영한 수동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3861로의 업그레이드를 거쳐 문워치 계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1 스피드마스터 문워치 프로페셔널 코-액시얼 마스터 크로노미터 크로노그래프 42mm.
2 1965년 6월 3일 제미니 4호 임무를 수행한 우주비행사들이 찼던 스피드마스터 ST 105.003 모델.HUBLOT
오렌지 사파이어 케이스
위블로는 사파이어 케이스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온 브랜드다. 그들은 사파이어로 케이스를 만든 두 번째 브랜드이며 투명한 사파이어로 무브먼트를 노출해 독특한 비주얼을 선사했다. 경도가 높은 사파이어의 물성이 주된 원인으로 가공 난이도가 높다. 이 부분에서 노하우를 쌓은 위블로는 보다 특별하고 개성 있는 시계를 만들기 위해 색을 띤 컬러 사파이어(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표현)에 도전했다. 빅뱅 투르비용은 이제 그린, 블루, 퍼플 등 형형색색으로 물든 반투명 사파이어 케이스로 빛난다. 그중 오렌지 사파이어는 위블로가 최초로 탄생시킨 사파이어 컬러로, 반투명 오렌지 케이스 안은 투명감을 한층 발산하는 스켈레톤 투르비용으로 채워져 사파이어 케이스의 매력을 배가한다.
빅뱅 투르비용 오토매틱
오렌지 사파이어
BREGUET
최초의 손목시계
시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손목시계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언제이고, 어떤 브랜드에 의해 등장하게 되었나?’라는 궁금증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은데 지금처럼 명문화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브레게는 최초의 손목시계를 만든 브랜드라는 강력한 근거를 가졌다. 다만 지금처럼 러그를 가진 시계로 한정할 것인가, 아니면 손목에 착용하는 형태라면 뭐든 허용할 것인가가 변수다. 만약 후자로 본다면 브레이슬릿(여성용 팔찌) 형태로 만든 브레게의 시계가 최초의 손목시계 칭호를 가져갈 가능성이 높다. 1810년 6월 8일 나폴리 여왕의 의뢰로 넘버 2639를 제작한 아카이브가 브레게에 남아 있기 때문. 명확한 스케치와 상세한 디테일은 누락되어 있지만, 제작의 각 공정을 위해 기록한 내용이 보존돼 있다. 넘버 2639는 얇은 타원형 케이스에 리피터 기능을 갖춘 컴플리케이션 워치로, 머리카락과 금사로 꼬아낸 브레이슬릿을 장착해 손목에 착용할 수 있는 형태였다. 현대의 레인 드 네이플은 넘버 2639를 기반으로 완성한 워치로 오리지널과 같은 타원형 케이스에 손목시계 시대에 접어들며 정형화된 러그를 배제한다. 이는 넘버 2639의 뚜렷한 흔적이며, 최초의 손목시계임을 드러내는 분명한 증거이기도 하다.
1 레인 드 네이플 9838 워치.
2 브레게 최초의 투르비용 워치에서 영감받아 제작된 1801BR 워치.writer Koo Kyochul 타임포럼 대표
editor Lee Min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