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의 미덕
새해 다짐은 물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커다란 지침을 얻을 수 있는 명사들의 에세이를 소개한다.
2020/1 • ISSUE21
writerJang Dongsuk 〈뉴필로소퍼〉 편집장, 출판평론가
”나는 힘껏 나무 밑동에 팔을 돌려서 안는다. (…) 나무 진 냄새가 나긋하게 코에 스민다. 코를 벌룽거리다 말고는 숨을 크게 쉰다. 나무 향이 온 살갗을 타고 번진다. (…) 내일, 모레, 글피쯤이면 아흔이 될 이 나이에 마음만은 어김없이 나무로 살고 싶다. 그리하여 소슬하되 다소곳하고, 우람하되 고즈넉하게 노년의 삶을 다듬고 싶다."
새해가 되면 장밋빛 꿈에 부푼다. 이런저런 계획으로 새로운 삶을 다짐하기도 한다. 비록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될 때가 많지만, 부푼 꿈과 희망만으로도 마음에 희열이 가득 찬다. 새로운 꿈과 계획을 세웠다면, 더욱이 작심삼일을 반복하고 있다면, 이 책들에 주목해보면 어떨까. 인생은 하루 이틀 뛰고 말 경주가 아니라, 평생 달려야 하는 애씀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이 책들이 잘 보여준다.
나이 듦, 어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한국학의 거장 고故 김열규 선생의 <아흔 즈음에>는 평생 우리 문화와 문학을 연구하며 체화體化한 삶의 지침이 담겨 있다. 아흔을 바라보며 평생 천착한 시간과 고독, 죽음과 고통, 배움과 노동, 사랑과 자연, 자아와 이웃 등의 주제를 풀어낸 이 책은, 갑작스럽게 발병한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다듬은 유고 에세이기도 하다. 김열규 선생은 나이 든다는 일의 미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여느 때처럼 솔직했다. 산책도 수영도 마음껏 즐길 수 없는 몸의 한계와 크고 작은 병고 앞에서 나이 드는 서글픔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움직이는 부동不動”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시간의 의미다. “삶이 마치 무슨 쭉정이 같다. 흩어지다 만 몇 가닥의 꽃잎 같아 보인다”는 선생의 말은 아흔 가까이 살아낸 사람만이 전해줄 수 있는 인생의 고언이다.
선생은 삶을 아름답게 하는 비결로 ‘감사’를 꼽는다. 아흔이 되어서도 잊을 수 없는 일은 평생 자신에게 삶의 기회를 준, 그 문을 열어준 이들의 얼굴이다. 가족과 친지, 이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감사한다. 그들이 있기에 자신이 한국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고, 인문학자로 인생을 마무리할 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흔 즈음에>는 숱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쓴 책이기도 하다.
살다 보면 왜 젊은이들이 부럽지 않겠나. 나이든 사람들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불평 아닌 불평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어른이 부재한 시대 아니던가. 그러니 그들에게 억지로 존경과 존중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만 “가장 자기다운 노년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믿음을 가지고 “평범하지만 새로운 진리와 위안으로” 나이 듦을 누리려고 노력하는 일만 하면 된다. 나이 들면서 마주하는 몸과 마음의 고통이 만만치 않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어야만 젊은 세대의 존중과 존경도 다시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열규 선생은 이미 60대에 교수직을 내려놓고 낙향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에 매진했다. 선생은 말한다. “내일, 모레, 글피쯤이면 아흔이 될 이 나이에 마음만은 어김없이 나무로 살고 싶다. 그리하여 소슬하되 다소곳 하고, 우람하되 고즈넉하게 노년의 삶을 다듬고 싶다.” 그 바람대로 살다가 죽음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김열규 선생은 우리 곁을 떠났다. 그의 가르침을, 그의 새로운 책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가르침만큼은 올 한 해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참모습은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의 정신적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섬>은 지성으로 가득한 에세이집이다. 그가 보기에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이고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자신을 방어하는 일에 몰두하며 인생의 여명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어” 헤아릴 길이 없다. 그럼에도 그 결정적 순간이 언젠가 온다는 믿음을 잃지 말 것을,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을 그는 권유한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밤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문학평론가 고故 황현산 선생의 <밤이 선생이다>는 1980년대부터 2013년까지 쓴 산문 중 삶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여든 편의 글을 선별한 책이다. “나이가 들면 어둠은 더욱 많아집니다.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빛나는 순간은 아주 가끔이죠. 그래도 다행인 것이 나이가 들면 어둠에 익숙해지고 어둠을 용서하게 된다는 거예요.”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낮보다, 외로울망정 자신의 눈에 삶을 고정시킬 수 있는, 하여 밤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고 선생은 말한다. 자신을 잊고 시류에 떠다니는 삶에 지친 당신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나는 건강에 집착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과 교류하고 싶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 자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베풀어야 할까? 그리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아껴야 할까?’ "
내 나이가 참 좋아지려면
세계적인 심리치료사 메리 파이퍼의 <나는 내 나이 가 참 좋다>는 70세 작가의 삶과 직업적 경험이 녹아든 에세이다. 메리 파이퍼는 “나는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가?”를 항상 스스로에게 묻기를 권한다. 그래야 노년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고, 젊음을 애써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이 드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고 단정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기쁨과 행복도 있다. 이제 80, 90을 넘어 평균수명 1백 세 시대를 맞이했다. 이러한 때에 나이 듦의 미덕을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를 통해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