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가 더 좋은 이유
2020/2 • ISSUE 22
writerChoi Jeongdong 〈중앙일보〉 기자
나는 LP로 음악을 듣는다. 음반이 CD로만 발매됐거나 LP를 구하기 힘든 경우 CD를사기도 하지만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산울림 1·2·3집을 묶은 CD 박스반이 한정판으로 나왔을 때 반가운 마음에 구입했으나, 옛LP를 다시 하나둘 사 모았다.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과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튀르 그뤼미오가 연주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K.304를 LP로 들어보라. 슬픈 듯 아름다운 음악도 가슴을 시리게 하지만 바늘이 비닐 레코드를 긁어서 내는 소리가 놀랍다. 바이올린은 참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고 피아노는 수정처럼 맑다.들을 때마다 새삼 감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귀가 LP만 반기고 CD는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오디오 동네에는 LP만 진짜라며 CD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골수가 많다. 나는 그 정도로 까다롭지는 않다. 모든 LP가 좋은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고, 어렵사리 구한 판이 틱틱 잡소리라도 내면 음악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LP를 좋아하는가. 무엇보다 큼직하기 때문이다. 손바닥만 한 CD를 만지다가 묵직하고 큰 비닐 레코드를 양손에 받아 들면 ‘그래 이게 음반이지’ 하며 만족한다. 크기가 왜 중요한가 하면 재킷의 그림 때문이다. 산울림의 음반 표지 그림은 김창완이 크레파스로 직접 그렸다. 3집에는 눈망울 큰 여인 얼굴을 점묘화 기법으로 그렸는데 멀찍이 떨어져서 봐야 그 신비로운 표정이 떠오른다. 나는 이 음반 B면 전체를 차지하는 18분짜리 대곡 ‘그대는 이미 나’를 가끔 듣는다. 음악이 질주하는 동안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김창완의 ‘청춘’, 내 젊은 시절의 ‘회상’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2017년 슈베르트 후기 소나타 음반을 냈다.재킷 사진은 머리가 허연 노인 지메르만이다. 나는 그가 데뷔 초기에 연주한 모차르트피아노 소나타 음반을 즐겨 듣는데 재킷의 사진은 청년 지메르만이다. 풋풋한 청년이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었다. 나는 두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모차르트(K.280)와 슈베르트(D.960)를 연이어 들었다. 여리고 푸릇한 음악에서 황혼의 눈물겨운 음악으로 넘어가는 순간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역시 재킷의 커다란 얼굴 사진 때문이었다.
LP가 좋은 것은 턴테이블을 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세기 전 영국 BBC에서 방송용으로 개발한 가라드 301 턴테이블은 견고하고 아름답다. 턴테이블은 앰프나 스피커와 달리 움직인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1분에 33과 1/3회전의 속도로 빙글빙글 돈다. 관능적인 곡선을 그리며 S자 형태로 휜 암Arm은 레코드 위를 천천히 미끄러져 20~30분마다 한 번씩 원호를 그린다. 그때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암을 원위치시키고 레코드를 바꾼다.
움직이는 턴테이블은 각별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라보고 있으면 나를 위해 열심히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다. 자연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소파에 드러눕지 않는다.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이러는 게 별난 것인가 싶어 역시 LP 마니아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 역시 그렇다고 했다.
LP가 끌리는 이유는 또 있는데 그것은 LP의 단점이기도 하다. 비닐로 만든 레코드는 서서히 낡아간다. 최근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부르고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가 반주한 슈베르트의〈겨울 나그네〉음반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전체적으로 잡음이 많았다. 좋아하는 음반이라 조심스레 다뤘는데도 그랬다. 아마도 30년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 낡은 것을 모르다가 그날 긴 세월을 한꺼번에 느낀 것이리라. 자글자글 들리는 잡음은 주름 같았다. 나의 겨울 나그네〉는 매년 겨울을 맞을 때마다, 함박눈이 내릴 때마다 나에게 가만가만 노래를 불러주며 나이를 먹어왔다. 그 세월 동안 나도 나이를 먹었는데 그걸 모르고 레코드 낡은 것만 이상타 생각했다.
턴테이블이 돌아갈 때 LP의 소리골에서 음악을 읽어내는 것은 카트리지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지만 가격이 만만찮고 오디오 중 가장 혹사당하는 부분이다. 나는 덴마크산 오르토폰 SPU를 쓰는데 조만간 하나 더 장만할 생각이다. 오래된 LP에서 지속적인 잡음이 난다는 것은 카트리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LP 시스템은 이렇듯 어르신 돌보듯 마음 쓸 일이 많다. 그런데도 흔들림 없이 고수하는 것은 무한한 디지털과 달리 절실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아이팟을 하나씩 안긴 스티브 잡스도 집에서는 LP로 음악을 들었다고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