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안내는 여행 경험을 완전히 바꾼다. 로마에 갔을 때 일이다. 스페인 광장 근처 언덕 위에 있는 빌라를 빌려 숙소를 잡았다. 창을 열면 가까이 공원이 펼쳐지고 멀리 시내가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저녁 무렵, 지하철로 근처 역에서 내려 숙소로 가는 길을 구글 지도에서 안내받았다. 최단 거리와 최소 시간이 이 지도의 법칙이다. 음성을 따라 가파른 계단을 낑낑 오르고, 좁은 골목을 몇 번이나 가로질러 숙소까지 이동했다.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확실히 편리했다. 그런데 저녁을 먹으려 방에서 나오자, 역까지 가는 길을 좀처럼 떠올리지 못했다. 또다시 구글 지도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정보는 명령이고 또 예속이다. 인간을 실행할 뿐 ‘생각하지 않는’ 노예로 만든다. 역에서 숙소까지 나의 이동은 구글 기록엔 남았을지 몰라도 나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슬픈 일이다. 편리를 빌미로 억울하게도 삶의 한순간이 통째로 증발한 셈이다. 로마에 왜 왔던가? 속도와 효율은 서울에서 이미 충분히 겪었다. 정신없이 휩쓸려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불쌍해서 일단 마음의 속도를 늦추고 영혼을 정비하려고 무작정 여기로 떠나오지 않았는가. 여기에서도 삶을 잃어야 한다면 여행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빨리빨리’는 우리의 삶을 질식시킨다. 소설가 밀란쿤데라는 ‘속도의 엑스터시’를 즐기는 현대인을 “오토바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사람”에 비유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면 모든 게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신체적,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그런데 인간의 몸은 일정 강도 이상의 속도를 견디지 못한다. 찢어지고, 부서지고, 망가진다. 영혼도 마찬가지다. 얼빠지고, 산만해지고, 마침내 고갈된다.
주인으로 살려면 기계에 올라탈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직접 세계를 확인하면서 움직여야 한다.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물집들, 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때보다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구글의 안내가 아니라 지도를 손에 들고 스스로를 안내해야 한다. 구글의 명령을 따르면 경험이 스마트폰에 축적되지만, 내 눈으로 하나하나 확인하고 내 발로 검증하면 세계가 내 안에 들어와서 쌓인다. 낯선 세계를 내 안에 가져오는 것, 이것이 여행의 정의가 아니었던가.
한 갈래 골목마다 하나의 세계다
여행지에서 숙소를 찾아 짐을 부리고 나면, 일단 주변을 둘러보려고 무작정 걷는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둘러보면서 지도를 머릿속에 만들어간다. 오래된 도시일수록 골목은 다른 골목으로 이어져 끝이 없다. 바깥에서 보면 막다른 듯한데 길모퉁이를 돌면 너른 길로 열리기도 하고,뻥 뚫린 것 같은 길도 갑자기 끊어지면서 저택에 가로막힌다. 터덜터덜 돌아 나오다 보면 샛길이 있고, 문득 들어서서 걷다 보면 숙소 옆 골목까지 쭉 이어지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한번 지나친 골목을 다시 걷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차라리 일부러 길을 잃는 쪽을 택해야한다. 전혀 엉뚱한 길이 아니라면, 아침마다 지나는 길을 달리하고 저녁마다 돌아오는 길을 바꾸면서 걷는 편이 낫다. 한 갈래 골목마다 하나의 세계다. 비슷해 보여도 완전히 다르다. 어느 공간이든 인간과 함께 진화한다. 골목안 사람들의 삶이 남긴 자취를 어떤 식으로든 담아낸다.골목들이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파리나 런던에서는 좋아하는 소설의 배경으로 쓰인 장소나 건물을 마주치는 등 뜻밖의 횡재를 한 적도 있다.이런 건 여행 안내서에 없다. 최근에 발표된 소설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장소를 걷다 보면 이상한 기시감이 들곤 한다. 그러다 골목을 빠져나오는 순간, 표지판을 보고 갑자기 깨닫는 것이다. ‘여기가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걸었던 거리로구나.’ ‘어라, 괴테의 집이네.’
일없이 골목마다 내키는 대로 기웃거려도, 유서 깊은 동네에서는 아무도 길을 잃지 않는다. 바둑판처럼 길이 반듯하고 찍어낸 듯 집 모양이 엇비슷한 동네에서나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아파트 단지가 끝없이 늘어선 신도시에 처음 이사했을 때, 한밤중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어 몇 블록이나 거리를 헤맸던 악몽이 떠오른다.〈참 괜찮은 눈이 온다〉에서 소설가 한지혜 역시 비슷한 경험을 토로한다. “이상한 일이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 길 한번 잃지 않고 살았던 나는 넓은 길에서 오히려 막막하다.” 그렇다. 인간은 “너무 좁아 담벼락이 어깨를 스치는” 골목이 아니라 심신의 한계 이상으로 속도를 올려야 하는 탁 트인 8차선 도로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하루 이틀이 지나서 자신이 붙은 다음에는 아예 지도를 버리는 편이 낫다. 발길 닿는 대로 길을 이어가고 눈썰미로 구분하는 것이다. 눈길 끄는 것으로 골목 하나하나에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면 된다. 파스타 길, 슈퍼 길, 소품 예쁜 의상실 길, 파랑 대문 길, 프리지어 화분길…. 때때로 막다른 골목이 나오고, 얼기설기 복잡해 보여도, 골목은 몸을 늘 다른 골목으로 옮겨준다. 주변을 살피면서, 천천히, 슬금슬금, 멀리까지 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을 드나들 때마다 반복한다. 여행지를 떠날 때쯤이면 어느 순간 동네 하나가 내 안에 들어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바로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