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충전이 아니라 문턱이다
2022/3 • ISSUE 23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은 기억함으로써 과거를 만들고, 주목함으로써 현재를 이루며, 기대함으로써 미래를 생성한다. 타자의 시간에 맞추어 살아가는 노예의 시간은 우리 삶을 쓰레기로 만든다. 권력의 시간을 좇을 때, 우리 삶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writer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빅벤, 여왕의 시간을 생산하다
빅벤Big Ben.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사원 동쪽 끝에 붙은 거대한 시계탑이다. 얼마 전 엘리자베스 타워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을 향한 갈망을 수직선에 새겨 넣은 고딕 양식의 탑이다. 런던에 흔한 안개가 광장에 자욱하게 깔려 있다가 탑으로 기어오르면서 전체를 휘감는다. 신의 손가락이 건져 올린 듯 뾰족한 탑 끝만 간신히 보인다. 신비로운 풍경이다.
불현듯 종소리가 하늘에서 쏟아진다. 1859년 만든 이 탑에는 거대한 종이 달려 있다. 신이 우렁차게 선포한다. ‘세상의 안개에 미혹되지 마라. 구원은 반드시 있다.’ 구원, 즉 진리란 무엇인가. 희미함 속에서 분명함을 보는 것이다. 덧없는 것 속에서 영원한 것을 느끼는 것이다. 웅장한 종소리는 신의 숨결로 이루어져 있다. 15분마다 한 번씩 런던 하늘을 가득 채우면서 신적인 질서를 퍼뜨린다. 물론 종소리가 실제 생산하는 것은 시간이다. 누구의 시간인가. 여왕의 시간이요, 영제국의 시간이다. 한때 런던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제국의 수도였고, 동시에 세계의 배꼽이었다. 이곳에서 영제국은 하늘의 소리를 빌려 세계의 질서를 만들어냈다. 이 종소리에 맞추어 기차가 움직이고 일터에서 일이 시작되고 일상의 약속이 정해진다. 해 뜨고 지는 시간도 다르고 계절의 순환도 제각각인 온 나라가 제국의 질서에 맞추어 균질화된다. 타고난 리듬도 이질적이고 이룩한 습관도 천차만별인 ‘나’들이 여왕의 시간에 포획되어 각자의 시간을 잃어버린다.
"그러고 보면 행복은
추억의 형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자유를 행사해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
기쁨의 기억을 만드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
벌레의 삶, 노예의 시간
불행이란 자신의 고유한 삶을 빼앗기고 타인의 삶에 맞추어 사는 데서 온다.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놀고 싶을 때 놀지 못한다면, 노예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찍이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에서 회사의 시간에 맞추어 살다가 벌레로 전락해버린 현대적 삶의 불행과 불안을 폭로한 바 있다.
소설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외판 사원이다. “날이면 날마다 출장”을 가는 “힘든 직업”으로,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불규칙하고 질 나쁜 식사, 항상 바뀌는 탓에 절대 지속될 수도, 결코 정들 수도 없는 인간관계 등”을 불평하고, “악마가 이 삶을 모두 쓸어가라지!” 하고 자기 인생에 저주를 퍼붓는다. 죽도록 일해 집안의 빚을 갚고 난 후에는 사장 앞에서 떳떳하게 사표를 던지고 싶어 한다.
그레고르는 노예처럼 일한다. 그의 직장 생활은 불행 속에 전개된다. 그러나 일을 쉬는 휴일이 주어지면, 그는 무엇을 하는가. 하고픈 일을 마음껏 하면서 자유를 만끽하는가. 연인과 사랑을 나누거나 가족과 친밀성을 확인하는 기쁨의 시간을 보내는가. 독서하고 사색하면서 영혼을 돌보는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홀로 “기차 시간표를 연구”한다. 출장에 필요한 스케줄을 짜는 것이다. 감시도, 닦달도 없는데, 그는 회사 일에 자기 시간을 스스로 바친다. 회사 시계에 항상 접속된 상태로 스스로를 작동시키는 인간기계로 사는 쪽을 택한다.
영국 시인 월터 스콧은 말한다.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늘 작정한다. 그러나 정작 새로운 삶을 시작할 시간을 찾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먹고 마시는 일을 하루하루 미루다가 굶어 죽는 것과 같다.” 행복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미래에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다. 과거는 이미 사라졌으니 존재하지 않고, 미래 또한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힘을 다해서 이룩한 행복이 없다면 우리 삶에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행복은 추억의 형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자유를 행사해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 기쁨의 기억을 만드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
필요할 때 행복할 자유를 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젠가 불행을 대가로 받는다. 더 이상 노예로서 자기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는 순간, 그레고르처럼 행복에 굶주린 채 먼지처럼 스러진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등에 사과가 박힌 채 죽은 후, 그의 시신은 하녀의 손에 쓰레기처럼 버려진다. 전면적 불행을 견디면서까지 소중히 여겼던 가족은 그레고르의 불쌍한 죽음을 애도하기는 커녕 희망에 부풀어 교외로 소풍을 떠난다. 노예의 시간은 무참하고 무의미할 뿐이다.
좀비의 시간, 모든 사람이 진짜 사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쓰이는 최악의 클리셰 중 하나가 ‘충전의 시간’이다. ‘충전’이라니, 너무나 기분 나쁘다. ‘충전’은 반드시 ‘방전’을 전제로 한다.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너덜너덜할 정도로 소진하고, 약간의 자유마저 또 다른 방전을 예비하는 데 사용한다면 삶이란 얼마나 비천한가. 끔찍하고 꺼림칙하다. 방전과 방전 사이, 충전의 시간이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뿐이다. ‘너는 벌레다. 너한텐 너절한 인생밖에 없다.’ 들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세계를 예민하게 감각하고 언어를 까칠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누구나 무던한 노예가 된다. 빅벤의 종소리에 맞춰 언뜻 시계를 확인하는 이 사소한 행위야말로 충전의 스위치요 방전의 방아쇠다. 바라는 일보다는 바라지 않는 일을 하도록 우리는 철저히 훈육되어 있다. 자신도 모르게 자유를 반납하는 것이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진짜 사는 것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은 기억함으로써 과거를 만들고, 주목함으로써 현재를 이루며, 기대함으로써 미래를 생성한다. 그런데 타자의 시간에 맞추어 살아가는 노예의 시간은 우리 삶을 쓰레기로 만든다. 빅벤의 시간, 즉 권력의 시간을 좇을 때, 우리한테 무엇이 남던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기억할 것도, 주목할 것도, 기대할 것도 이 삶에는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자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 자신의 유한한 시간을 소비하기에 이 삶은 열심히 해도 뿌듯하지 않고 허탈해지며 열정을 다해도 충만하지 않고 소진된다. 이것은 이미 죽었는데 죽었는지 모르는 채 충동을 좇아 한없이 움직이는 삶, 그러니까 좀비의 삶이다. 좀비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무섭지 않고 오히려 슬프다. 좀비가 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자도, 본능만 남아 흐느적거리는 좀비도 모두 우리 자신이니까.
문턱의 시간, 미지의 양식에 이르는 길
“전혀 몰랐던 일이 내 주변에서 시작되고 있었어./ 나는 더 나중에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일은 계속 기다려왔던 거야.” (‘문턱’ 중에서)
일상을 구성하는 습관적 규칙이 무너지고 “전혀 몰랐던 일”을 발생시키는 경이의 규칙이 작동하는 삶의 문턱이 인생길 군데군데 놓여 있다. 우리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이 문턱을 “계속 기다려왔”지만 항상 “나중에 일어날 일”로 치부한다. <이솝 우화>의 여우처럼, “저 포도는 시다”고 하거나, 돈키호테의 조카딸처럼 “밀가루보다 더 좋은 것으로 만든 빵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문턱의 순간을 전적으로 맞이한다. 심장이 바라면 달리고 피가 끓으면 춤을 춘다. 일상의 습관을 무찌르고 혼신의 힘을 다해 삶의 새로운 질서를 이룩한다. 카프카는 한 사람의 고유성이 온전히 실현되는 이 길을 “미지의 양식에 이르는 길”이라고 불렀다. 쏟아지는 종소리 속에서 절망한다. 여행은 충전이어서는 안 된다. 절망했으므로 기대한다. 이 여행이 미지의 삶이 열리는 문턱으로 존재하기를. 어느새, 안개 위로 새어나온 햇살이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