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드레스덴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04년이다. 엘베 강변에 옛 작센 왕국의 영광을 간직한 건축물이 즐비했다. 레지덴츠 궁전과 궁정 교회, 츠빙거 궁전, 젬퍼 오페라하우스 등. 그런데 이 건물들은 모두 복원한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새로 쌓은 흔적이 뚜렷하고 지붕 위에 도열한 인물상 중 하얗게 빛나는 것은 최근에 깎은 것이었다. 건물이 너무 검다 싶었는데 그것은 불에 탄 흔적이었다. 비로소 ‘엘베 강의 피렌체’라 불리던 드레스덴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돌무더기로 변한 참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1945년 2월 드레스덴에 수많은 피란민이 모여들었다. 중세 대학 도시 하이델베르크가 폭격을 면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드레스덴도 오랜 역사 도시로 군수 시설은 없었다. 기대는 어긋났다. 2월 13일 밤부터 영미 연합군 공군은 드레스덴 전역에 폭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융단폭격이라 불린 무차별 폭격이었다. 고도 드레스덴은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전후 독일 정부는 대표적인 건축물만이라도 옛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해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다. 궁정 교회와 젬퍼 오페라하우스가 1980년대 복원됐고, 레지덴츠 궁전은 2013년 완공을 목표로 검게 그을린 벽돌을 다시 쌓았다.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건축이었던 성모 교회는 내가 갔을 때 온몸에 비계를 뒤집어쓴 채 마무리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하나의 거대한 돔으로 이루어져 드레스덴 시민이 ‘돌로 만든 종鐘’이라 부르며 사랑했던 교회는 전쟁 막바지에 화염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교회를 가장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한 것은 복원 비용이 엄청나기도 했지만, 전쟁의 참화를 고발하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 7월, 소련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드레스덴을 방문했다. 당국은 그에게 <5日 5夜>라는 소련·동독 합작 영화의 음악을 지으라고 요구했다. ‘5일’은 연합군이 드레스덴을 폭격한 기간이다. 쇼스타코비치는 드레스덴에 머물며 과제를 수행했다.그런데 그는 이 도시에서 현악사중주 한 곡을 순식간에 지어낸다. 불과 사흘 만이다. 나중에 발표한 악보에는 “파시즘과 전쟁 희생자에게 바친다”는 헌정사를 썼다. 그것은 당국의 요구였다. 모두 그가 비극적인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곡을 썼다고 생각했다. 쇼스타코비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드레스덴에 갔으니까 그가 본 드레스덴은 아직 돌무더기 상태였을 것이다. 특히 성모 교회는 앙상한 벽체만 몇 군데 남은 채마르틴 루터의 동상이 그 앞을 문지기처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쓴 현악사중주 8번 Op.110은 전쟁 희생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죽은 뒤 공개하라고 한 회상록 <증언>에서 “8번은 자전적이며 파시즘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밝혔다. 친구 이삭글리크만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무도 나를 추모하는 작품을 쓸 것 같지 않으니 내가 쓰는 게 낫겠다”고 작곡 동기를 밝힌 바 있다.절친 레프 레베딘스키는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자살을 생각했다. 작품은 그의 비문碑文”이라고 증언했다. 실제로 현악사중주 8번은 1975년 그의 장례식에서 연주됐다.
쇼스타코비치는 드레스덴의 폐허에서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떠올리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예술적 강요에 고통을 느꼈던 것같다. 그런 감정은 오선지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1악장 서두의 조성調性을 자신의 이름 이니셜인 D(드미트리), S·C·H(쇼스타코비치)로 한 것도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니 1악장에서 바이올린 솔로가 연주하는 고통에 찬 신음은 자신의 것이며, 4악장에서 네 악기가 반복하는 충격음은 드레스덴 폭격이 아니라 강박에 시달리는 작곡가의 내면이라고 봐야 한다. 사흘 만에 완성한 것은 그때까지 쓴 여러 작품에서 주요 선율을 빌린 덕분이었다.
보로딘 현악사중주단은 쇼스타코비치의 모스크바 자택을 찾아가 이 작품을 연주한 적이 있다. 물론 작곡가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뜻이었다. 음악이 흐르자 쇼스타코비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연주를 끝낸 네 음악가는 조용히 악기를 챙겨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보로딘 사중주단은 작곡가와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지만 가장 생생한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은 말로 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쇼스타코비치가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할 수 있었다면 훨씬 행복한 삶을 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애처롭지만, 소련의 압제 아래였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걸작도 많다. 현악사중주 8번도 그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