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에 대하여
2020/4 • ISSUE 24
어리석은 사람만이 무지개 아래에서 황금 냄비를 찾는다.
writer 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집은 정결하고 성스러운 공간이다
일터에서 돌아올 때, 집 앞에서 잠깐 망설이곤 한다. 세상 어딘가에
무엇을 두고 온 것처럼, 놀이터 벤치에 한참 앉아 있는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어느 날인가, 그네를 타는 이웃을 만난 적도 있다. 한밤중이다. 눈을 감고 얼굴에 닿는 찬 바람을 느끼다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어둠 건너 편에서 그네가 천천히 흔들리는 중이었다. 도대체 무슨
마음이 작동하고 있는 걸까.
신화에 따르면, 귀가는 귀향의 형식을 띤다. 트로이전쟁에 나갔다 스무 해 만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페넬로페는 알아보지 못한다.
놀랍지 않은가. 낮에 짠 베틀의 옷감을 밤마다 풀어가면서 남편을 기다리던 이 지혜롭고 정숙한 여인이 눈앞에 있는 오디세우스를 알아
보지 못하다니. 이상한 일이다. 호메로스는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집에 들어서도 영혼이 시를 쓰지 못한다면, 삶이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가."
어쩌면 한밤중 놀이터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낸 것은 현관 문턱을
넘어서는 데 필요한 어떤 마음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집에 들어서기 전에 마음의 옷을 갈아입으려 한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내 얼굴을 멀쩡히 알아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인간에게 집은 특별한 공간이다. 지구 위에는 있지만, 세계 안에 있지는 않다. <모든 공간에는 비밀이 있다>에서 건축가 최경철은
집의 세 가지 기원을 이야기한다. 첫째, 엄혹한 자연환경에서 불의
온기가 미치는 영역이 주는 무형의 안정감. 둘째, 자기 주변에 빙 둘러 가상의 선을 그어 나와 타자를 분리하고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를 창조하는 것. 셋째, 자궁에서 겪은 따스한 웅크림의 기억을 재현한 영적 공간. 어느 쪽이든 ‘집은 안정감, 포용, 따뜻함, 웅크림, 껴안음, 경계, 가족이 뒤섞인’ 장소다. 온전함 속에서 영혼이 안식하면서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한 사람의 정체성이 생겨나는 곳이다.
‘자기만의 방’은 혼자 있는 방이 아니다
인간은 집에서 자기 얼굴을 본다. 홀로 방에 있으면, 사물들이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침대가 편안해지고, 책상이 다정해지고, 의자가 안락해지고, 책이 속닥거리고, 음반이 흥얼대고, 그림이나 사진이 소곤대고, 선반에 올려둔 키 작은 인형이 이야기를 붙여온다. 집에서는 아무리 하찮은 것도 모두 의미가 있다. 손댈 때마다
기억이 일어서고 만질 때마다 추억이 솟아난다.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이 던져진 세상에서, 자유를 반납한 채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지라도 이 삶이 완전히 허무한 것만은 아니다. 눈길을 던질
때마다 온 사물이 말을 걸어오는 둥지가 나한테는 있지 않은가.
아무 물건이나 집 안에 들여놓는 사람은 없다. 완구점에는 같은 공장에서 같은 재료로 찍은 듯 생산한 수많은 헝겊 인형이 있다.
하지만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아무 인형이나 손에 들고 나오는 사람은 없다. 모두 같아 보여도 하나도 같지 않다. 나한테 잘 맞는 인형은 때깔부터 다르다. 인형을 수없이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우리는
차이를 분별하고 운명을 예감할 때까지 지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차이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오랜 분투를 통해 한 토막 차이를 구분하고 한 가락 의미를 분별하는 섬세한 감각을 안목이라고 한다. 안목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집 안에 들여놓은 물건이 있던가. 전혀 없다. 노련한 항해사는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를 일일이 구분한다. 영혼을 소중히 하는 사람은
시간을 들이고 발품을 팔아서 물건을 고를 줄 안다. 작은 차이를 크게 볼 줄 아는 단련된 정성만이 세계 내에서 의미를 이룩한다. 공간이 없다면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터전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의 시간은 쓰레기나 다름없다.
집은 우리한테 선언한다. 아무것이나 문턱을 넘게 하지 마라.
네 영혼에 적합한 것은 항상 따로 있다.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가혹하게 갈래짓고, 가치 있는 것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면,
당신은 세상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과 물건을, 자아와 장소를 깊이 연결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얼굴의 고유성을 확인한다. 물건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영혼의 오랜 동반자다. 손때를 묻힐수록 낡지 않고 소중해진다.
이러한 물건으로 가득한 ‘자기만의 방’에서야 영혼은 안식한다. ‘자기만의 방’은 혼자 있는 방이 아니다. 오히려 친구들이 넘쳐나는 ‘우리의 방’이다. 안목을 수없이 반복해 실천함으로써 자기 영혼에 적합하도록 아늑히 길들인 공간이다. 인테리어의 인문학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현자는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다
‘방콕 생활’은 아무리 오래 해도 질리지 않는다. 햄릿은 말한다. “맙소사, 나는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 있어도 나 자신을 무한한 공간의
왕이라 생각할 수도 있어.” 방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동작을
연출하는가. 놀고, 먹고, 서고, 앉고, 눕고, 읽고, 보고, 잠자고, 꿈꾸고, 만들고, 즐기고, 말하고, 키우고, 어울리고, 상상하고, 호흡하고,
존재한다. 자아를 옥죄고 시간을 재촉하며 의무를 압박하는 세상에서 탈출해 전적인 자유 속에서 활력 있게 헤엄친다.
세 평 방 안이 감옥이 아니라 아무리 돌아다녀도 낯설기만 한
세계가 진짜 감옥이다. 불안의 구름이 일어서고 악몽의 폭풍이 몰아치는 저 세계와 단절된 이 공간이 없다면, 인간은 모두 미쳐버릴지 모른다. 프랑스 작가 모나 숄레에 따르면, 집은 “우리를 숨 쉬게 해주고, 애써 투쟁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게 해주며, 자신의 욕망을 탐구하게 만든다.”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 호흡하고, 온전한 평화
속에서 안식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이 진실로 바라는 바를 궁구하는
것, 이것이 칩거의 형이상학이다.
깊이를 이룩하고 높이를 만들려면 너무 많이 움직이면 안 된다.
제자리 뛰기를 반복하면서 상상력의 다리를 단련하거나, 화두를 거듭해 던지면서 사유의 송곳을 갈아야 한다. 누구나 집에서는 ‘영혼의
시’를 쓰려 한다. 물리적인 집을 존재의 집으로 바꾸려 한다. 뒹굴거리는 것은 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이 심오함 속에서 안식하기는커녕 여전히 세계의 권태에 시달리는 것뿐이다. 휴대폰을 들고 접속하기 위해 안달하는 것은 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이 고요 속에
서 자신을 들여다보기는커녕 여전히 세계의 부산함에 정신이 나가
있는 것뿐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말한다. “타인의 지배 아래 놓인
일상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고독한 세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래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 머릿속에서 안달복달하는 소란을 추방하지 못한다면 집에 있는
고독을 즐기지 못하고 홀로 있는 외로움에 시달린다. 타자의 질서에서 해방되어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추방된 듯
한 상처를 입는다. 고독을 다루는 힘이 없다면 ‘홀로’는 자유가 아니라 공포가 된다. 우리는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지고, 주어진
자유에서 도피해 자신의 시간을 타인의 지배 아래 맡기려 한다. 먹고 사는 일에 길드는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인 양, 돈에 홀리고 물질에 집착한다.
돈은 천박한 것이다. 세상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그 자체로 고귀하다. 유일무이해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자기 생명을 무엇과 교환하겠는가. 그러나 돈은 세상 모든 것과 바꿀 수 있기에 사실은 전적으로 무가치하다. 우리가 인생에서 반드시 얻어야 할 보람
중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가족도, 친구도, 명예도, 사랑도, 믿음도, 진리도… 돈과는 전혀 상관없다. 경제를 조금만 공부
해도 알겠지만, 돈은 동전이나 지폐 같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다. 신용이란 이름의 유령일 뿐이다. 시간을 돈과 바꾼다는 것은 인생을
허깨비로 만드는 것이다. 타인의 지배에 시간을 맡기면서 돈벌이를
위해 열심을 떨수록 마음은 헛헛해진다.
집에서 안식한다는 것은 한낮의 노동에 지친 몸을 쉬게 하는
것이요, 한 주일의 번잡함을 정신에서 완전히 걷어내는 일이다. 집에 들어서도 영혼이 시를 쓰지 못한다면, 삶이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가. 완전히 불쌍할 뿐이다. 소설가 헨리 밀러는 말한다. “현자는
자기 집을 벗어나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무지개 아래에서 황금 냄비를 찾는다.” 이 세상 어디쯤에 황금 냄비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집에 있어도, 바깥에 나서도 소용없다. 그러나 황금 냄비의 존재를 믿고 찾으려는 사람은, 세상 온갖 것을 끌어모으고 자신의 영혼에 맞도록 정화해 집 안에서 황금 냄비를 주조한다. 집 안에 보물을 둔 자, 왜 여행을 떠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