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노래
2020/5 • ISSUE 25
인간은 나무를 닮을 때 완전해진다. 생각할 줄 아는 관찰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writer 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유기농 우유를 발효해 집에서 만든 요거트에 블루베리, 바나나, 호두, 아몬드 등을 넣어 간단히 아침을 먹자마자 가벼운 차림으로 뒷산 산책을 나선다. 재택근무의 지루함도 무찌르고, 다리 힘도 붙이기 위해서다.
청명한 빛이 연푸른 잎을 밀어낸다. 따스한 공기가 희고 붉은 꽃을 끌어낸다. 땅 아래 뿌리들은 풀려난 물에 맞춰 춤추고 있으리라.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공기가 맑고, 어제 보슬보슬 내린 비에 땅이 부드럽다. 산에 들자마자 신발과 양말을 벗어 맨발로 흙을 즐긴다. 아직은 서늘한 흙이 발바닥을 간질이며 마음을 흔들어 깨운다. 가까이 산과 들에서는 만물이 일어서고, 멀리 논과 밭에서는 씨앗이 대지에 안긴다. 걷기에 참 좋은 시절이다.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을 읽어보면, 산수에 묻혀 유유자적 하는 선비가 꿈꾸는 삶은 어느 봄날에 구현된다. 하루는 친구를 불러 푸른 풀을 밟으며 산책을 하고, 하루는 이웃과 함께 냇가에서 나란히 목욕을 즐긴다. 걸어서 봄기운을 몸으로 확인하고, 씻어서 부정한 것을 물리치려는 뜻이다.
낮에 뜯은 나물은 무쳐서, 저녁에 잡은 물고기는 익혀서 꽃나무 아래 상을 벌이고 벗들과 술잔을 돌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맑은 꽃 향기가 술잔을 휘돌고, 붉은 꽃잎이 난분분 옷자락에 떨어진다. 때때로 혼자여도 좋다. 나지막이 노래 부르며 천천히 걸어서 물가 바위를 골라 걸터앉아 물소리 들으며 맛있는 차를 마신다. 사람의 행복은 웅장한 야심이 아니라 정녕 사소한 하루에 달려 있다.
인간과 나무는 형제다
풍광을 즐기며 천천히 오르면 정상까지 두어 시간. 나뭇가지마다 돋은 어린잎이 안에서 빛이 스며나듯 색깔이 환하다. 한 시인은 이즈음 숲 풍경을 두고 “빛 한 점씩 물고 나오는 새싹들”이라고 썼는데, 표현이 적합하다. 나무들이 울창한데도 숲이 환하다. 나무 아래 발을 쉬면서 올려다보면 햇빛이 잎을 투과해 얼굴로 쏟아진다. 마치 잎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만 같다.
빛에 민감하다는 점에서 인간과 나무는 형제다. 인간과 식물은 주변의 밝기를 인지하는 특정한 유전자 집단을 공유한다. 이 유전자 집단은 동물과 식물의 같은 조상에서 물려받았다. 심해나 지하 등 어쩌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한 생명 대부분은 빛의 숭배자로 진화해왔다. 생명 활동이란 결국 빛을 제 안으로 받아들인 후 부단히 무언 가를 생성하는 일이다. 나무는 빛을 이용해 물과 이산화탄소를 포도당으로 바꾼다. 인간 역시 빛을 받아 세상을 인지하고 생체리듬을 조절하는 등 일련의 생리작용을 수행한다.
영혼 역시 나무를 닮았다. 진리가 빛이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인간이 살면서 해야 할 최상의 활동, 즉 철학이 어두운 동굴에서 나와서 빛을 향해 걷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요한복음’은 “생명은 사람들의 빛” 이라고 증언한다.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이다. 몸이 햇빛으로 생명을 유지하듯 마음은 진리의 빛으로 채워야 생생해진다. 나무와 육체와 영혼은 모두 주광성이다. 빛을 향해 저절로 구부러진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을 볼 때마다 마음은 고요히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꽃이 허무라면 나무는 영원이다
둘레길을 살짝 벗어나 나무 사이로 발걸음을 옮긴다. 10여 미터 정도 비끼자마자 참나무 숲이 제법 울창하다. 수직으로 뻗어 오른 나무들 사이, 손바닥 햇빛 자리마다 철쭉이 한창이다. 연푸른빛이 은은히 감도는 대기 속에서 진분홍빛으로 불타는 꽃들이 눈을 홀린다. 실학자 유득공은 “진봉산 가운데 붉은 철쭉꽃(進鳳山中紅躑躅)/ 봄 오자 저 혼자 층층 피었네(春來猶自發層層)”라고 읊었다. 철쭉이 가득한 진봉산은 고려의 왕도 개성에 있다. 시인은 철쭉이 자발自發한다고 말한다. ‘저절로 피다’, ‘저 혼자 피다’ 등 어떻게 옮겨도 상관없다. 철쭉의 찬란함은 한때의 영화를 잃은 채 무너진 성곽의 덧없음을 부채질한다. 달포를 넘기지 못하고 저 꽃들도 아마 흔적 없이 형체가 무너질 것이다.
꽃이 허무라면 나무는 영원이다. 인간은 저 단단한 수직들을 처음부터 사랑해왔다. 온 세상 신화가 태초의 신성한 나무를 찬미한다. 수메르의 생명나무, 중국의 건목建木, 켈트족의 위그드라실 등이 대표적이다. 단군신화의 신성한 박달나무도 있다. 세상 중심에 있는 이 세계수들은 생명력 넘치는 부활과 재생의 상징이다. 사람들에게 안식과 평화를 준다. 이들이 말라 죽을 때까지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 또 신성한 나무는 하늘까지 솟아서 땅과 하늘 또는 인간과 태양을 이어주는 사다리가 된다. 숲에서 인간과 하늘은 정답게 교통한다. 보들레르는 노래한다. “자연은 하나의 신전, 거기 살아있는 기둥들에서/ 이따금씩 어렴풋한 말소리 새어 나오고.”
때때로 나무를 어루만지고 안아본다. 숨을 들이마시며 수피 냄새를 맡고, 귀를 갖다 대어 수액 소리를 듣는다. 나무와 친연성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나무 뿌리는 중력 탓에 땅에 결박되어 있는데, 줄기와 가지는 빛을 좇아 하늘로 치솟는다. 인간도 같다. 〈파우스트〉에 따르면, 인간은 “신의 영역에 도달하려 애쓰지만 늘 자기 자신에 머무르도록 저주받은” 존재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메뚜기처럼 팔짝 팔짝 뛰다가 늘 풀숲에 처박히는” 이 저급한 존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악마의 진짜 얼굴은 사악함이 아니라 무의미다.
시간의 허무를 인정한 채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존재가 악마다. 나무가 시간을 견디며 나이테를 지어가듯 인간은 패배할 줄 알면서도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 분투한다. 이 소명을 버리는 순간 인간은 악마의 먹이로 떨어진다. 1954년의 어느 날, 카뮈는 이 엄연한 사실과 마주쳤다.
"나무는 인간에게 수직적 초월을 가르친다.
나무가 높은 가지에서 싹을 틔워 빛을 받아들이듯,
타고난 물리적 눈높이를 버리고 하늘 가까이로
영혼의 시야를 옮기도록 만든다."
수평적 초월과 수직적 초월
“모든 사치는 지루하기만 했으며, 불행을 참을 수 없었다.” 카뮈가 고향인 알제리를 떠나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후였다. 〈이방인〉과 〈페스트〉의 작가였고, 〈시시포스 신화〉의 철학자였다. 카뮈는 스타였다. 그러나 그는 숨이 막혔다. 한없이 일에 쫓기는 일상, 밀려드는 압박, 번잡한 관계, 지지부진한 반복은 그를 지치게 했다. ‘더 이상 못 참겠다’, ‘더 이상 못 살겠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 인간은 어떻게든 자기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길은 어디로 나 있는가. ‘옆으로 이동하기’와 ‘위로 이동하기’ 두 갈래다.(‘아래로 이동하기’는 돌아오기가 너무나 어렵다. 죽음이니까.)
방황이나 여행은 수평적 초월이다. 낯선 곳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나려는 것이다. 괴테는 이탈리아에서 “익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필연성을 발견한다. 푸시킨은 캅카스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우울을 이겨낼 건강한 러시아와 마주친다. 카뮈는 운이 나빴다. “돌아갈 배를, 물의 집을, 밝은 날을 기다렸”으나, 알제리 바다에 이르지 못한 채 교통사고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 여행은 영혼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다.
특히 위대한 자연은 우리를 확장시킨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막막히 드넓은 초원, 장대히 이어지는 산맥, 하늘 가득한 별의 군무 등 자연의 장엄한 광경은 우리 감각을 판단 정지에 빠뜨리고, 우리 내면의 신들을 춤추게 한다. 어떤 여행이 한 사람의 인생을 전적으로 바꾸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명상이나 기도는 수직적 초월이다. 인간은 항상 별것 아닌 일로 지지고 볶는다. 무의미한 것에 시간을 탕진한다. 탐욕으로 자신을 파괴하고, 쾌락으로 자신을 학대한다.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말한다. “인간은 헛된 수고만 기울이며/ 인생을 아무것도 아닌 근심으로 갉아먹는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만 욕망을 투자하기 때문이다. 자신한테서 한 걸음 물러서려면, 내면의 눈으로 스스로를 보고 신의 언어로 자기 욕망을 다시 써야 한다. 생각할 줄 아는 관찰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나무는 인간에게 수직적 초월을 가르친다. 나무가 높은 가지에서 싹을 틔워 빛을 받아들이듯, 타고난 물리적 눈높이를 버리고 하늘 가까이로 영혼의 시야를 옮기도록 만든다.
희랍인은 높은 곳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것을 가리켜 테오레인theorein이라고 했다. 영어 theory(이론)의 어원이 된 말이다. 테오레인은 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행위다.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것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다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에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에 신은 세상을 온전히 본다. 수직적 초월이란 나무를 닮는 일, 즉 신의 눈으로 세상을 조망하는 것이다.
인간 안에는 나무가 있다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한다. 나무를 닮는 궁극적 방법은, 나무를 마음에 데리고 사는 일이다. ‘춘소春宵’라는 시에서 박목월은 인간에게는 낮의 이름과 밤의 이름이 있다고 말한다. 낮의 이름은 “하루의 직업”에 쓰이는 이름이고, 밤의 이름은 “고독이 기르는 수목의 이름”이다. 제목 춘소는 ‘봄밤’이라는 뜻이다. 뜰 안 나무는 손을 뻗어 달을 붙잡고, 꽃은 바람을 흔들어 향기를 퍼뜨린다. 시인은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놀랍게도, 인간 안에는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는 대낮의 활동이 아니라 한밤중 홀로 성찰하는 내면의 역능으로만 키가 큰다. 모두가 잠든 밤에 고요히 앉아서 자신을 돌이킬 때만 나무는 꽃을 연다. 그래서 시인은 이 나무를 “밤에 자라나는 이름”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누구나 아는 주민등록증 속 이름이 아니라 고독이 양분을 주는 이름이다. 시인이 “박목월 안의 박목월”을 기르듯, 인간은 하루를 ‘돌이키는 나’를 하루 내내 ‘움직이는 나’로부터 떼어냄으로써, 즉 내면에 “고독이 기르는 나무”를 분양함으로써 자신의 진짜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묻고 싶다. 당신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