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과 ‘공간’의 레이어
2020/6 • ISSUE 26
작가 허명욱은 사진 작업에서 출발해, 최근에는 옻칠을 주로 활용하며 평면과 입체 작품은 물론 테이블웨어 등의 소품까지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다. 6월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앞두고 전시 준비에 한창인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writerHo Kyoungyun(Art Journalist) editorKim Jihye
photographerPaek Sanghyun(FIJ Studio)
허명욱의 공간
이태원 근처에 있는 카페 ‘한남작업실’. 커피 향이 배인 빈티지 가구, 시즌마다 바뀌는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커피와 디저트를 담은 테이블웨어나 각종 소품이 예사롭지 않은데, 바로 작가 허명욱이 만든 것들이다. 카페 이름처럼 이곳은 작가 허명욱의 크리에이티브한 감각을 누구나 만끽 할 수 있는 곳이다. 허명욱은 평면부터 입체, 설치 등의 미술 작품을 제작하면서 단지 갤러리에 전시하는 것 외에도 보다 다양한 접근 방식으로 우리 일상에 예술적 감성을 침투시킨다. 작가 허명욱을 직접 만난 곳은 용인에 있는 또 다른 작업실로, 그의 모든 작품이 실제로 탄생하는 공간이다.
‘한남작업실’과 달리, 좀 더 프라이빗한 느낌이 듭니다.
가끔 갤러리스트나 미술 관계자가 오거나 특별히 투어를 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는 제가 실제로 작업하는, 말 그대로 작업실이죠.
이곳에 와보니 작가께서 어떻게 작품을 만들고 생활하는지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해서 그런지 건물도 5개 동이나 되고 일반적인 작가 작업실에 비해
규모가 꽤 큽니다.
그런데도 작업할 공간이 부족해요. 예전에는 충무로, 안국동, 한남동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작업을 하다가 2013년에 이
곳으로 이전해 모두 한곳에 모으게 되었는데, 오래 지내다보니 이렇게 가득 차버렸어요. 그래서 지금 추가로 작업실을 짓는 중인데, 아마도 올 여름쯤에는 완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4백~5백 호 정도의 큰 작업을 여럿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대형 회화 작품을 위한 전용 작업실이 필요하고, 기존 작품과 수집품까지 보관할 수 있는 1백20평 규모의 지하
수장고도 두려고 합니다.
작업실의 외양뿐 아니라, 그 안을 채우는 모든 사물도 모두
작가를 닮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가 직접 지은 공간이기 때문이겠죠. 또 이곳에 있는 모든 가구는 제가 작품에서 사용하는 옻칠로 마감했습니다. 오디오나 TV 같은 전자 제품도 빈티지를 이용해 그 위에 옻칠을 올려 저만의 물건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심지어
제가 대형 작업을 할 때 올라타는 크레인조차 직접 색을 칠하고, 그 위에 제 이름의 이니셜과 날짜를 적고 나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한남작업실’의 테이블웨어나 〈서울 포커스-손의 축제〉 전시에서 선보인 소품을 제작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성격인가
봐요.(웃음) 누가 작업실을 방문하면 차라도 한잔 대접해야
하는데, 컵이 마음에 안 드니까 제가 직접 만들어보고, 또 그걸 담아내는 트레이 등등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공간의 어울림에 대한 보이지 않는 집착이 있는 것 같아요. 작업실에서 겨울을 지내면서 난로도 직접 만들었고, 스위치나 싱크대
수전까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만들려고 합니다. 결국
그것이 저의 라이프 스타일인 셈이죠. 그리고 오늘날의 예술은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Huh Myoungwook, ‘Untitled’, 2016, Otthil and gold leaf on metal, 120x120cm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만들려고 합니다.
결국 그것이 저의 라이프 스타일인 셈이죠.
그리고 오늘날의 예술은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허명욱의 시간
허명욱의 작품을 딱 한 단어로 정의해본다면, 그것은 바로 ‘시간’일 것이다. 그는 최근 주된 기법으로 옻칠을 사용하는데, 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그래서 허명욱의 작품 한 점에는 아주 긴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그의 작품 제작 과정을 기록한 비디오를 보면 작업실 문 너머로 바깥 풍경이 계속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봄의 연둣빛, 여름의 진녹빛, 가을의 단풍빛, 겨울의 새하얀빛…. 자연의 빛과 작가의 견고한 옻칠이 만나, 시간의 아스라한 색을 품은채 비로소 작품 한 점이 완성되는 순간이 온다.
한 작품을 제작하는 데 오래 걸린다고 들은 바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걸리나요?
글쎄요. 작품마다 다르지만, 금속이나 자작나무로 된 ‘스틱’을 활용하는 작업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게요. 일단 옻칠은 한번 칠하면 마르는데 무조건 하루 이상 걸립니다. 그리고 채색과 건조를 여덟 번 반복해야 제대로 된 색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스틱 6백 개가 모인 작품의 경우, 적어도 4천8백일이 걸린 것이라 볼 수 있겠죠.
옻칠이라고 하면, 어두운 갈색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옻칠로도 매우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어요.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죠. 저는 옻칠로 ‘그날의 색’을 만들어요.
이 색은 배합 비율과 기후나 환경에 따라 모두 다르게 발색되기 때문에 그 어떤 색도 의도적으로 다시 만들 수 없습니다.
신세계 소장품은 금색을 칠했는데, 이유는 무엇입니까?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옻칠은 여러 변화를 겪으며 나오는 색입니다. 반대로 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원불멸의 색’으로 통하잖아요. 다시 말해 저는 이 작품에서 변화하는 시간과 변하지 않는 시간의 공존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영감은 어디서 얻는지 궁금합니다.
작업을 통해서 다음 작업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또 제가 오가는 공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살피곤 해요. 그 행위가 곧 저에게 사색의 시간이자 성찰의 시간, ‘쉼’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