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수觀水, 물을 보다
2020/06 • ISSUE26
무념無念, 복잡한 심사는 스르르 흩어져서 사라진다. 무상無想, 답답한 생각은 올올이 씻기어 맑아진다. 유유자적悠悠自適, 속됨에서 마음을 멀리 보낼 줄 아니 세상일이 모두 엉김 없이 흘러간다.
writerJang Eunsu 출판편집인, 문학평론가
고아한 선비는 물을 보나니
화면 한가운데 바위에 선비는 두 팔을 팔짱 껴 얹은 후 그 위에 가만히 턱을 괴었다. 선비 뒤로는 짙은 먹을 써서 수직으로 세운 절벽이 웅혼하다. 머리 위로는 하늘하늘 매달린 넝쿨 풀이 경쾌하다. 눈 아래 수평으로 흐르는 강물은 고요하다. 아름다운 삼각형이다. 강물이 밑변이고, 절벽은 대변이다. 둘이 만나 견고한 직각을 이루면서 화면 전체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절벽 끝자락에서 강물 쪽을 향해 대각선으로 쏟아진 넝쿨 풀은 빗변이 된다. 이로써 화가는 시선의 역동적 운동을 출현시킨다. 화면 왼쪽 아래, 넝쿨의 빗금과 물의 평행이 만나는 곳으로 자연스레 눈을 끌어들인다. 선비가 바라보는 곳도 거기, 미동 없이 흐르는 물이다. 선비는 반쯤 감은 눈으로 지그시 물결을 바라본다. 그윽한 눈이다. 귓속으로 밀려드는 물소리가 선비의 생각을 씻어 내리는 중일까, 느긋하고 평온한 얼굴이다.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입가에는 천진한 웃음이 한가득 걸려 있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고아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그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세상일이 힘들 때마다 찾아가 찬찬히 들여다본다. 종이에 먹으로 그린 작품이다. 조선 전기 강희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높은 이름에 비해 실물 크기는 작다. 가로 23.4cm, 세로 15.7cm. 언뜻 지나치기 쉬운 소품이다. 그러나 그림 앞에 서면 충격이 크다. 초연과 탈속, 기품과 격조, 고결과 우아…. 인간이 마땅히 가다듬고 길러야 할 품성이 그림 속 주먹만한 선비 안에 응축되어 있다. 선비의 눈은 시냇물을 보지만, 마음은 바다를 담았다. 광활하고 시원하다. 사방으로 통하고, 팔방으로 트였다. 무념無念, 복잡한 심사는 스르르 흩어져서 사라진다. 무상無想, 답답한 생각은 올올이 씻기어 맑아진다. 유유자적悠悠自適, 속됨에서 마음을 멀리 보낼 줄 아니 세상일이 모두 엉김없이 흘러간다.
인간 마음에는 물을 보는 선비가 있다
인간 마음에는 모두 물을 보는 이 선비가 숨어 있다. 요즘 집 앞 천변으로 가끔 산책을 나선다. 튀어나온 배를 견디다 못해 다리 힘도 붙일 겸 시작한 운동이다. 10km 쯤 천천히 걷다 보면, 곳곳에서 흐르는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들을 자주 만난다. 모두 홀린 듯한 얼굴이다. 망연한 평화와 따스한 고요, 표정이 물의 느릿한 운동을 닮았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천변 바위에 함께 앉아 있다. 천천히 흐르는 물을 가만히 무심하게 바라본다. 물은 마음을 빨아들이고 마음은 물을 닮는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무아無我라고 한다. 나라는 좁은 영토에 갇혀 있는 마음을 온전히 풀어놓아야 충만해진다. 이 상태를 영어로는 ‘mindfulness’라고 부른다. 좋은 번역어다. 무의미하고 불완전한 것에 안달복달하는 마음을 던져버려야 비로소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다. 무아는 ‘내가 없다’는 상태가 아니라 ‘나를 지우다’라는 동작이다. 요즘에는 이 말을 ‘마음 챙김’이 라고 옮기는데, 역시 적절하다. 마음을 챙겨야 작은 마음을 큰 마음 으로 바꿀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바로 세우는 명상이야말로 마음을 챙기는 데 참 좋은 실천이다. 명상의 궁극에서 인간이 부처가 된다면, 물을 보는 실천, 즉 관수觀水의 궁극에서 인간은 성인이 된다. 물의 인간, 이것은 극상의 인간됨이다. 한마디로 물은 인간성을 고양한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물을 좋아하나니,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일찍이 상나라 탕왕은 세숫대야에 이렇게 새겼다. “날마다 새로워져라. 또 날마다 새로워져라.” 세숫물에 얼굴을 비추어 보면서 하루하루 자신을 변혁해 나갔다. 물을 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더 나은 인간으로 가는 한 걸음이다. 저 강물을 바라보는 이들은 물결을 보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보는 것이고, 저마다의 마음을 비추는 것이고, 저마다의 먼지를 떠나 보내는 것이다. 물은 깊이가 있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겉을 보면서 속을 만질 수 없다면, 드러난 것을 보면서 숨은 것을 성찰할 수 없다면, 물은 한낱 H2O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물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깊은 심연에 되비친다. 비추면서 또 비치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물에서 자신의 내밀한 얼굴을 볼 수밖에 없다. 어떤 물을 보든, 그 리듬에 동조할 수만 있다면, 거기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물을 ‘내면성의 물질’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김정희,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Photocivic / Getty Images Korea
"옛 선비들은 ‘관수’에서 길을 찾았다.
세속에서 일하다 자신을 잃어버릴 듯하면,
산 깊은 곳 작은 시내를 찾아서
물의 힘을 빌려 마음을 바로잡았다.
하여 물을 바라보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산수를 읽는 것이다."
‘워라밸’도, ‘소확행’도 헛된 몸부림일 뿐
산다는 것은 세상 먼지 속에서 길을 잃는 일이다. 번잡함이 생각을 얼크러뜨리고, 저열함이 마음을 잡아먹는다. 한 걸음 두 걸음 물러서다 보면 인간으로 태어나 어느새 짐승으로 살아가기 십상이다. 우리가 이룩한 물질적 풍요가 우리 자신을 타락시킨다.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의 과잉이 우리 자신을 파멸시킨다. 도덕의 결핍과 신성의 상실, 내 면의 공허와 정신적 허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흑사병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가 오늘날처럼 인간을 괴롭힌 적은 드물었다. 일과 삶의 균형, 이른바 ‘워라밸’은 환상이다. 삶은 일 바깥에 있지 않다. 인간은 노동에서만 온전히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의 일 안쪽에 삶이 없다면, 당신의 삶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열정을 쏟아도 보람을 돌려주지 않는 악몽 같은 노동의 세계이기에, ‘워라밸’은 일 바깥에 삶이라는 환각을 창출해 자신을 위안하는 것에 불과하다. 화제작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장류진은 타락한 세상에 대항하는 유쾌한 기만을 윤리로 내세운다. 소설의 화자는 “4대 보험, 상여금, 특근수당, 연차” 등과 연결된 정규직 일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회사를 그만두는 대신, 차라리 배신해버린다. 야근하는 척 사장에게 점수를 따면서 저녁 8시에 오픈하는 콘서트 티켓 예매도 하고, 내친김에 “공휴일과 주말, 아껴둔 연차를 하루 붙여 3박 4일을 놀고 공연도 볼 것”을 꿈꾸며 항공권도 예매한다. 일의 전반적 슬픔에 삶의 소소한 기쁨으로 맞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고도 확실한 행복’의 추구는 몸부림이다. 오직 돈을 향해서만 달려드는 늑대의 세계에서 자신의 인간됨을 확인하는 행위다. 그러나 헛되다. 아예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만 혹독한 패배가 곧바로 찾아올 것이다. 기만에는 윤리가 없다. 윤리가 없으면 타자와 함께할 수 없다. ‘기만 동맹’은 불가능하다. 더없이 사악한 존재인 회사가 직원의 작은 기만을 언제까지나 눈치채지 못하리라고 믿는 것은 순진함일 뿐이다. 늑대에 맞서 또 다른 늑대가 되는 것은 문명의 길이 아니다. 긍정의 윤리를 만들지 못하는 실천은 결국 허무를 재촉할 뿐이다. 세상의 현자들이 현세 지옥에 절망하는 대신 어떻게든 윤리적 주체를 세우려 한 것은, 희망이 윤리의 대지 위에서만 굴러가는 바퀴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아버지 페트라르카는 말한다. “인간은 거칠고 잔인한 동물이다. 야수성의 옷을 벗고 인간성의 옷을 입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한 그렇다. 결국 자연 상태의 인간(homo)이기를 멈추고, 진화된 인간(vir)이 되지 않는 한 그렇다.” 인간으로 태어나 ‘더 나은 인간’으로 사는 길, 이것이 문명의 근본이다.
풍경은 보는 것이지만 산수는 읽는 것이다
풍경화와 산수화는 다르다. 풍경은 보는 것이지만 산수는 읽는 것이다. 산수에 풍광 좋은 경치를 담아 관객한테 보이려는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산수는 대개 마음의 경치다. 보이는 경치를 그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경치를 담는다. 특히 선비의 그림인 문인화 文人畵는 글이나 마찬가지다. 무엇을 그리든, 실제 그려진 것은 사 물이나 풍경이 아니라 정신의 기세다. 문인화는 매화나 난초를 눈앞에 두고 비슷하게 그리거나 풍경과 물상을 실제 보고 묘사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선대 화가의 그림이나 화첩을 걸어놓고 모사하면서 세부에 자신의 정신을 불어넣는다. 또는 오랫동안 시문을 읽고 그림을 공부해 머릿속에서 완전한 형태를 떠올린 후 그린다. 선대의 좋은 그림을 베끼되 형태가 아니라 마음을 본받고, 좋은 풍경을 상상하되 조형의 완벽함이 아니라 정신의 완전함을 추구한다. ‘세한도歲寒圖’를 보자. 추위에 오두막을 둘러싼 바위와 소나무는 화가의 눈에 포착된 풍경이 아니다. 고립 속에서 유배의 시련을 견디는 한 선비의 고고하고 굳건한 내면이 외적 형체를 얻은 것이다. 당연히 마음먹은 대로 붓을 놀릴 수 있도록 하는 고된 수련 없이는 이러한 풍광을 그리지 못한다. 김정희는 말한다. “나는 평생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몽땅하게 했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면 한낱 붓이 어찌 이토록 굳센 풍경을 일으키겠는가. 선비의 그림은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文字香書卷氣)을 갖춘 다음에야 제대로 된 풍격을 얻는다. 세상의 분진 속에서 몸을 놀려 지지고 볶아 봐야 아무 구원도 없다. 갈수록 흙먼지만 묻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서는 안된다. 인간은 새나 짐승과 어울려 살 수 없다. 선비는 세상의 속됨에 맞서 자신을 지킬 뿐이지 세상 바깥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나아가되 자신을 잃지 않고, 물러서되 주의를 놓지 않는 실천이 필요하다. 옛 선비들은 ‘관수’에서 길을 찾았다. 세속에서 일하다 자신을 잃어버릴 듯하면, 산 깊은 곳 작은 시내를 찾아서 물의 힘을 빌려 마음을 바로잡았다. 하여 물을 바라보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산수를 읽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이상형이 담겨 있다. 고아한 선비는 물을 보는데, 우리는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