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드의 연주를 듣고 독일 여자 못지않게 나도 놀랐다. 음악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3번 2악장이다. 소나타 13번은 ‘환상 곡풍’이라고 불리는데 악장 구성이 제멋대로라 그런 별명이 붙었다. 별로 유명하지 않고, 나도 유심히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굴드의 연주는 놀랍다. 약동하는 힘, 신비한 분위기, 뚜렷한 대비가 있다. 2분이 채 안 되는 2악장을 연주하는 동안 호텔 객실을 청소하던 독일 여성은 뮤즈의 날개를 타고 날았다. 그 음악이 저렇게 매혹적인가 싶어 다른 음반을 들어봤다. 에밀 길렐스는 너무 빠르기만 하고,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둔하다.
굴드의 베토벤 연주에 놀란 김에 묵은 과제 하나를 해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순서대로 모두 들어봤다. 음악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니까 한 번쯤 통독하고, ‘환상곡풍’ 2악장처럼 미처 몰랐던 보물도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연주자는 내가 가진 음반을 총동원해 가급적 다양하게 선정했다. 유디나, 폴리니, 소콜로프, 브렌델, 리흐테르, 루빈슈타인, 길렐스, 굴다, 미켈란젤리, 백건우 등 최고의 연주가들이 이틀간 베토벤 경연을 펼쳤다. 한 곡씩 독파하는 동안 신기했던것은 비창, 월광, 폭풍 같은 표제들이 낙엽처럼 떨어져나갔다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이름표들이 유치하게 느껴졌고, 32곡 1백3개 악장 모두가 살아 움직이는 베토벤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을 듣는 내내 궁금했던 것은 글렌 굴드였다. 베토벤의 다른 소나타들은 어떻게 연주할까. 친구의 음반 가게에서 굴드가 연주한 월광, 비창, 열정 엘피음반을 들고 왔다. 열정이 몇 바퀴 돌지도 않았는데 아내가 묻는다. “누구 연주? 많이 다르네.” 그게 정답이다. 굴드는 어느 누구와도 다르다. 어떤 곡을 연주하든.